어느날 눈이 내려서 온 천지가 하얀 설경을 이루어 놓은 새벽 나는 아침을 먹고 어린 동생들은 데리고 냇가를 따라 마을 입구를 걸어나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안됐다는 표정으로 제 나름대로 한마디씩 했습니다.
무릎까지 덮이는 눈길을 따라 얼마를 왔는지 추운날씨에 3 동생들을 업고 또 손에 붙들고 엄마 찾아 가는 길, 나는 울었습니다. 동생들도 울고요.
읍으로 나가는 고갯길, 이 고개를 마을사람들은 한터 고개라고 하지만 나는 눈물고개라고 짓고 싶었습니다. 우리 4남매가 울며 넘던 고개니까요.
고개를 넘어 한터란 마을에 들어섰어요 논둑을 걸어서 울며 엄마를 찾아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우릴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아주머니는 어딜 가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엄마 찾아 간다고 하니 우리를 타이르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안 듣고 가려고 했습니다. 가려는 우리들의 태도에 아주머니는 추운데 자기집에 들어가 몸 좀 녹이고 가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 말대로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아랫목에 앉혀놓고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고구마를 한 양재기 가져와 먹으라고 했어요. 동생들과 나는 먹었습니다. 큰집에선 눈치를 봐야 했지만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대하기 때문에 마음놓고 먹었어요.
다 먹고 난 뒤 아주머니는 또 우리를 달랬지만 나의 한번 먹은 마음은 다시는 큰집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생들은 엄마말만 들어도 울고 나역시 그러했지만 아무리 달래도 듣지않는 우리를 보시고 아주머니는 안됐다는 표정을 짓고 나가셨습니다.
잠시후 밖에 나간 아주머니가 나만 살짝 불렀어요. 아주머니 집에서 조금 떨어진 어떤 집 방 앞에 나를 데리고 간 아주머닌 방문을 걸고 들어갔습니다. 거기엔 그리도 보고 싶던 나의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나는 달려가 어머니품에 안겨 울었습니다. 얼마를 울고나니 어머니와 그 방에 계신 사람들도 모두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일까요? 떨어져서 살수 없는 어머니와 자식들 지금은 영영 떨어져 버렸지만 어머니 친척이나 친구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답니다. 얼마를 지냈을까 어머니는 나를 보고 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싫다고 떼쓰는 나에게『아버지가 오시면 집에 가마』하시는 말을 듣고야 나는 왔던 길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백원짜리 한장을 쥐어주며 동생들 울 적에 과자 사주라고 했습니다.
동생들을 데리고 다시 큰집으로 오니 동생들은 또 다시 울며 엄마 찾아 가자고 했지만 서울 갈려면 기차도 타야하므로 아버니 오시면 가자고 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가 서울 간다고 나갔다 온 후부터 구박의 눈길은 더 심했습니다. 나는 하루에 한번씩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 한오리나 되는 길을 매일 다녔습니다.
큰집에 온지도 한달이 다 되어가고 내일은 설날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설날이 없었습니다. 큰집식구들은 새옷을 만들고 있었지만 우리 남매에게 올 옷은 단지 올 때 입고 온 단한벌의 옷뿐이었습니다.
큰집 형제들은 큰어머니와 달리 마음들이 고왔습니다. 이곳에 와서 우는 우리에게 감을 주고 달래며 설날엔 아버지와 우리 엄마가 오신다고 하며 또 심심하게 있으면 같이 놀아주기도 했습니다. 설 전날 밤 잘려고 할때 아버님이 오셨어요, 작은방에 있던 우리 남매는 큰방에 가서 아버지를 보고 울었습니다. 동생들은 엄마는 왜 안왔느냐 하며 막 보챘으나 아버지는 아무말 없이 그냥 마음 속으로 울고 계셨습니다. 그날 우린 작은방에 와서 잠들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설날 아침 큰집의 어른들께 세배하고 우리들은 마을을 빠져나왔습니다. 동생들에게 엄마있는데 간다니까 모두 좋아했습니다.
추운바람을 맞으며 눈물고개를 넘어 어머니 계신 곳까지 왔습니다. 그 마을사람들도 우리를 가엾다며 과자와 떡을 주었습니다.
어머니 계신 집 대문안에 들어서니 어머니와 그 집 아주머니가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동생들은 엄마를 보는 순간 눈물을 흘리며 품에 안겨 울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항상 울어야했고 어머니 역시 울고 울었습니다
슬픈운명을 타고 났기에 흩어진 우리 5남매 지금도 서로 보고싶어 그 어느곳에서 울고있을 것입니다.
방에 들어간 우리는 어머님께 세배를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 집에서 조금있다가 우린 엄마 손을 잡고 큰집으로 향했습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마을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의 일인양 반갑게 맞으며 위로와 걱정을 해주었습니다. 큰집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계셨지만 그날은 아무일없이 지냈습니다. 며칠이 지난후 우리는 아버지 와함께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부산가서 살자고 했습니다. 처음 가보는 부산, 아니 가서 살고 또 어머니를 잃어버린 부산 퍼런 물결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의 소년시절을 불행으로 점지해준곳 그것이 바로 부산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에 도착한 부산은 정들었습니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에 산 위의 판자집, 확 트인 넓은 바다, 부산에 도착한 우린 아버지의 아는집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튼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들만 남기고 서울로 이사짐을 가지러 갔습니다. 며칠 지나 부모님과 형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이젠 우리집도 웃고 살수있게 됐습니다
남부민등 송도가는 밑의 길, 방파제 근처에 점포 한간과 큰방ㆍ마루가 있는 집 거기서 우린 또 다시 식당을 겸한 주류도 매상을 차려 살게되었습니다.
나와 동생 영순인 이곳 남부민국민학교에 들어가 나는 5학년 영순인 2학년으로, 또 정순인 다음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습니다.
고난을 겪고 난 우리집, 그러나 정말 또 다시 우리에겐 다복한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걱정이 있다면 내가 공부 안하는 것 외엔 정말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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