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구정이 지나면 교회는 사순절을 맞이한다. 매년 맞이하는 사순절의 뜻을 구태여 역설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때를 맞이하고 그 시기를 보내는 동안 그 시기에 대한 참뜻을 밝혀 보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은 아니라 본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 사순절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이세의 40일 단식과 40년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선택된 복지로 향하는 도중에 받았던 고통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40일의 단식과 수난을 생각하고 그 기념을 새롭게 하는 교회 전례이다. 교회는 2천 년 간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의 뜻을 항상 새롭게 하려고 무진 노력해 오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순절을 맞아 우리의 신앙생활과 결부시켜 볼 때 그 의의는 자못 크다 하겠다. 첫째 예비신자의 경우 성세의 준비를 보다 뜻있게 하는 시기이다. 죄 중에 살던 인간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았고 수난으로 속죄를 했고 부활로써 구원의 증명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그리그도 안에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암흑에서 빛을 본 것이다. 그러나 죄에서 구원으로 가는 길은 얻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다. 빛을 보고 그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 사람은 자기의 노력이 없이는 그 빛이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제 예비신자들은 빛의 가치를 알았고 암흑의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으리라 믿는다. 구원의 빛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는 스스로 느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사순절을 생각해 보자. 우선 그리스도 안에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은 이미 신앙의 감미로움을 맛보았으리라 믿는다. 영세 받은 신자로서 신앙의 희열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인가 그 신앙에는 잘못이 있다.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얻어진 영복으로의 초청을 받고도 즐겁지 않다고 한다면 아직 초자연적인 구원의 뜻을 모르는 신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모르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구원을「유다이즘」적으로 해석한다면 확실히 현세의 신앙은 거추장스럽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희열을 느끼기는 커녕 고통스럽게까지 느껴질 것이다. 현세에서 우리는 생존 경쟁에 허덕이고 있다. 그리고 위안을 찾고 있지만 그 위안이라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색다른 감각적이 아닌 것에 희망을 걸어 보려는 허망한 기다림에서 찾는 신앙은 확실히 참뜻을 못 보았고 보지도 못할 것이고 또 자기 류의 해석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의 소유자는 현세적 쾌락이나 물질적 풍요함이 있을 때 쉽게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멀어질 뿐만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반발까지 일으킨다. 예를 들어 보면 교회 행정의 시정을 바란다는둥 사제의 생활이 어떻다는둥 신앙과 별 상관 없는 것에 눈길을 돌린다. 이런 신자일수록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입만 놀리는「참새」신자다.
잘못된 신앙의 또 한 가지는 천국의 희열은 생각하지만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에는 무관심한 신앙이다. 부활의 환희는 생각하지만 수난의 고통을 생각지 않는 신자들이다.
즉 봄에 씨를 뿌려 놓고 긴긴 여름의 시간을 게으름으로 보내면서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는「얌체」족속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가 게을러서, 더위, 환경 등, 엉뚱한 곳에 핑계를 돌리고 만인이 같은 환경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것은 보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이 역시 신앙으로 본다면 겨울에는 성당 안이 추워서 여름이면 성당 안이 더워서 등등의 핑계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앙이란 자기 노력으로 얻고 얻은 것은 실천해야 할 일이지 누가 공으로 갖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순절도 작년과 같이 달력장을 들추면 부활주일이 언젠가 하며 막연히 허송세월 할 것인가 묻고 싶다.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 향상과 가정 성화를 위해 가능한 온갖 노력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다. 예를 들면 서울 대구 등지에서 사순절 특별강론을 마련해 놓고 신자들을 기다린다. 예년에 비해서 얼마나 참석할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이번 만큼은 큰 성과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다면 사순절은 기도와 희생의 시기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는 한다지만 희생은 하지 않는다. 희생 없는 기도나 기도 없는 희생이나 다 쓸모 없는 감정이다. 바라는 것은 많지만 대가는 지불하지 않으려는 심사다. 또 우리가 희생을 바치는 것은 속죄의 대가다. 잘못을 용서 받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희생하는 일이다. 여기에 희생의 종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간단한 예로, 매일 아침미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밖은 쌀쌀하여 등은 따뜻한 온돌방이 그립다. 여기서 희생의 정신을 발휘해서 가장 좋은 기도인 미사에 참여하면 일거양득 격으로 좋은 일이 된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 도저히 미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신자들은 다는 아니겠지만 대개가 핑계다. 물론 꼭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속죄의 뜻으로 물질적으로 희생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오락 기호를 절약해서 뜻있는 교회사업에 도움이 되도록 바치는 것도 훌륭한 희생이다. 물질을 교회에 바치는 것은 신자의 정성이 중요하지 그 다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은 옳다.
과연 정성으로 바치는가가 문제다. 뜻있는 사순절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 사순절을 통해 참 신앙의 감미로움을 맛보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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