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숙아, 너 지금 좀 나올래? 점심같이 먹자. 부탁할게 있어』
보험회사 소장인 여고동창 전화다.
『무슨 부탁인데? 내 몸으로 때울 수 있는거면…』
『너 신입시험 좀 쳐줄래? 모집실적 땜에 그래… 실은 대학 나온 인력이 필요해. 너처럼 「이름 있는」삶이면 참 잘 될 거야… 지금은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후엔 나한테 크게 감사할거야…』
즉각적인 결단을 요하는 긴박한 순간이다. 『그건 내가 너무 내키지 않는 일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자기체질이나 적성은 자기가 제일 잘 알잖아? 그건 내분야가 아냐. 너한테 설득되기엔 내 가치관이 너무 확고해…』『그건 아는데 보험은 전망이 아주 좋아. 난 보험에 미친사람이란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단 연락을 받고도 병원으로 안가고 회사에 나왔어. 남편만 가라고하고. 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치료비에 보태는 게 현명하잖니?…』
섬뜩하고 아찔하다. 대신 거절하긴 쉬워진다. 그런 사고방식이면 더 끌 것도 없으니까. 자식이 사고가 나면 본능적으로 달려가는 게 어미 아닌가. 보험에의 사명감이 우선이고 돈이 본능을 능가한 다면 할 말 없다. 경제는 이런「영웅들」에 의해 발전한다. 나는 사회생활 30년을 했어도 이런 사고방식을 체질화하지 못했다. 내가 돈이 최고였으면 문학을 택했을 리도 없고, 넥타이 하나 없던 남편과 결혼했을 리도 없고, 방송국 다닐 때 내가 「붙어먹고 사는 사람들」과 좌충우돌을 일삼았을 리도 없다. 또 우리 여섯 식구의 유일한「밥줄」이었던 번역을 내동댕이쳤을 리도 없다. 마음만 먹으면 번역도 「돈 밭」이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나는 돈 밭에 마음이 없다. 내 마음은 문학에 있고 만학을 통한 자기구현에 있다 돈을 숭배하는 조직들과 결연히 투쟁하는데 내 사명감이 있다. 내가 재정난에 처한 것을 「딱해하는」많은 친구들의 염려와 지원은 참 고마우며 그「사랑」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에 못잖게 내 개성과 가치관을 이해받고 싶은 마음도 갈급하다. 「이해가 사랑보다 어렵다」던 방송국 친구 말이 새삼 생각난다.
<외화번역가ㆍ서울월곡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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