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이다. 봄이 정말로 오는 것일까? 지난 겨울은 너무나 참혹하였다. 봄은 아예 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는 것인가? 그 추운 겨울 내내 땅 속에 숨어 잠자던 두꺼비가 사알살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한 발자욱 내딛고는 주위를 살피고 또 한 발자욱 내밀고는 다시 살핀다. 입에 무거운 자물쇠를 채운 채 죽어도 다시는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입을 달삭거리기 시작한다. 가끔은 손도 움찔거린다. 그리고 다시 침묵. 그리고 다시 달삭. 움찔, 침묵, 달삭, 움찔. 이것이 무엇이가? 겨울이 다 간 것인가? 아니다. 겨울은 아직도 엄혹하다. 아직도 매운 눈보라가 거리와 산하와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고 있다. 그런데 왜 두꺼비는 기어나오는가? 왜 사람들은 입을 움직이기 시작하는가?
인간에 대하여 자연의 봄과 역사의 봄이 일치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억척스러운 악순환 속에 살고 있음을 말한다. 자연의 봄이 언제니 두꺼비의 저 답답스런 동작으로 시작되듯이, 역사의 봄도 언제나 학생들의 저 비조직적인 항의로부터 시작된다.
한 번 입을 닫았던 사람이 다시금 입을 열기까지는 퍽도 지리하고 퍽도 고통스러운 탐색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해마다 거듭된다. 걷어채여 넘어졌다 다시 가까스로 일어서고 걷어채여 넘어졌다 다시 가까스로 일어서고 칠전팔기. 우리는 해마다 죽고 해마다 살아난다. 짓밟아도 짓밟아도 다시금 다시금 살아나는 저 통례의 원시적 생명력처럼. 그렇다. 1961년 이래 우리의 역사는 통례의 역사다. 그러나 그 통례의 역사 위에 바로 그 끈덕진 통례의 역사가 창조한 변화, 조용하나 거대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체감이다. 일체감을 소리 높이 외치는 자들의 그 일체감이 아니라 한 줌도 못되는 그 자들에 대해 반대하는 절대다수가 그 반대하는 마음에서 서로 공감하는 말없는 일체감이다. 정치 부재 경제 파탄 음모 부정부패 부당한 탄압 이런 것들을 소상히 아는 것은 이젠 소수의 지식인만이 아니다. 날품팔이 일꾼으로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알고 있다. 모두 다 거센 욕설이 목구멍까지 꽉 차 있다. 적과 벗은 분명해졌다. 적에 대한 자신의 이 가파른 인식, 피해자끼리의 일체감, 한결같은 분노, 이 변화, 이것이야말로 참된 봄의 서곡이며 역사적 비약의 담보다.
마치 대하의 두꺼운 얼음이 깨어지듯이 이 변화는 우렁차고 찬탄한 봄을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여전히 경칩일 뿐이다.
두꺼비의 저 걸음걸음이 어쩔 수 없는 봄의 압력 때문이듯이 민중의 이 변화가 주는 압력 때문에 매운 겨울 바람 속에서도 사람들은 이제 겨우 입을 달삭거리기 시작한다. 경칩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 그것은 아직도 통례를 반복하는 일이다. 나는 작년 어느 날 최루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대학 구내로부터 다음과 같은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짓밟힐수록 더욱 억세게 자라나는 황야의 억새풀처럼 폭풍 속에서도 곧게곧게 뻗어오르는 저 푸른 참대들처럼 우리는 끝끝내 일어서고 끝끝내 싸울 것입니다. 싸워서 가어이 이 기나긴 겨울을 끝내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오고야 말 저 위대한 봄의 승리를 확신합니다. 민주 민족 평화의 저 휘황한 봄을 우리는 반드시 앞당기고야 말 것입니다. 청춘은 어떠한 총칼 아래서도 죽지 않는 불사조입니다. 살아나고 살아나고 타오르고 타오르는 불, 자유의 불, 우리는 영원한 민족의 활화산임을 자부합니다.』그 육성, 그 의지, 그 자부와 그 약속, 그것은 학생들의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우리가 외쳐야 하고 가져야 하고 지녀야 하며 실천해야 될 부활의 믿음 바로 그것이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더욱 더 큰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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