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4ㆍ5년 전에 허태영이라면 사형수로서 신문지상에 허다하게 보도되고 우리 가슴에 많은 여운을 안겨 주고 타계한 인물이다.
나는 그와는 숙친한 교분은 없어도 대전에서 부대는 다르지만 직무상으로 가끔 상면한 일이 있었던 관계로 그의 기사는 남달리 피부로 감촉하면서 빼지 않고 읽었고 때로는 기사 내용이 그의 육성으로 들려오는 듯한 느낌마저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 당시 나는 물론 외교인으로서 천주교가 어떠한 것인지 모르고 있던 터이지만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할 얼마 전에 김홍섭 판사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고 무한히 감동하였고 지금까지 그때 받은 감명이 생생함을 느끼고 있다. 그 내용은 대충『…부모ㆍ형제ㆍ처자ㆍ친척은 각각 천주의 안배하심에 따라 자기 길을 갈 것인즉…』하고 모든 것을 천주 성의에 의탁한다는 대오해탈의 경지를 체득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는데 당시 나는 변하였구나 하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죽을 사람이 과연 이럴 수가 있을까! 사랑하던 모ㆍ형제ㆍ처자식을 생각하면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차원을 달리하는 사생관의 발견으로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그 무엇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반면 김홍섭 판사의 서신도 소개가 되어 허태영으로 하여금 그렇게 다르게 만든 원인도 어렴풋이 감독하였던 것이다.
오늘 김 판사의「무상을 넘어서」를 읽다가 동저 107頁∼116頁 간의 내용을 보니 14ㆍ5년 전에 느꼈던 그 심정이 되살아나서 자못 감개무량함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6년 전에 천주교에 들어왔다. 누구의 권유나 인도 없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어떠한 심리작용으로서인지 몰라도 여하간 들어왔는데 들어오게 된 경유는 어느날 신문 광고란에「인생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호소문을 보고 가톨릭 통신교리를 시작하고 근 1년 간 걸려서 이 과정을 마치고 통신에서 가르치는 대로 청파동 성당에 가서 김 레오 신부의 지도를 받고 곧 천주의 義子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어쩌다가 가톨릭교회에 들어왔는가 하고 돌이켜볼 때 더군다나 많은 종교 중에서 예수교를 택하고 또 예수님을 신봉하는 기독교 중에서 어떻게 해서 가장 올바른 천주교에 뛰어들었나 하는 것이 이상스럽기만 느껴진다.
잠재의식은 본인도 모르게 행동의 지침이 된다고 한다. 허태영 형제가 시범한 언행은 10년 간이나 나의 심중에 정착하였다가 무의식간에 나의 방향을 조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고요한 밤중에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기적소리를 듣고 홀연 신의 존재를 깨달을 수도 있는 일이며 깊은 가을 밤에 잡다하게 지저귀는 뭇벌레소리에서 오척 단구 속에 저 광대 무변한 우주를 발견할 수도 있는 노릇인데 하물며 10년 간에 받았던 감명이 나의 종교생활의 발판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허태영 형제나 김홍섭 판사와는 종교에 대하여 일언반구 논한 바는 없지만 그들은 나로 하여금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받은 연면한 참 교회를 얻게 한 성스러운 은혜를 준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무상을 넘어서」를 읽고 새삼 그들의 지난날의 모습이 눈에 선히 빛나며 그들이 천주의 인자한 품 속에서 평화로이 쉬어질 것을 새삼 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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