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관심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관심으로 싹 트고 관심으로 자란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사랑도 관심에서 시작되고 관심으로 자란다. 그리스도人의 생활은 관심의 생활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심 그 자체가 사랑이 될 수는 없다. 사랑의 반대인 증오도 관심을 사랑보다 더 크게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人의 관심은 사랑으로 충만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무관심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뿐 아니라 무관심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다.『나는 내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절대로 간섭하지 않습니다.』하고 하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좋은 것이 좋지 않습니까?』하는 신자도 있다. 간섭과 관심은 완전히 다르며 좋은 것과 문제가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간섭은 남의 권한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만 관심은 남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발휘케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좋은 것은 빈드시 잠잠하고 평온한 것과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활발하고 발전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人은 관심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自己 의무만을 완성하는 생활만으로 그칠 수 없고 천당 가기 위해서 죄를 범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피하기 위해 남이 일에 무관심하게 생활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 관심의 대상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자.
첫째로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웃의 영혼 구령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부족하다. 우리 이웃의 육신 생활에 대해서도 물론 관심을 두어서는 부족하다. 우리 이웃의 육신생활에 대해서도 물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이웃 중에는 가난한 사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병든 사람, 억울하게 박해 받는 사람, 버림 받는 사람, 고독한 사람 등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 이웃을 알고 있는가? 매일 만나면서도 그의 가정 형편, 그의 직장, 그이 이름을 알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리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치인과 기업가와 상인들은 사회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의 촛점은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분석 판단하고 거기에 적합한 수단 방법을 써서 사회를 구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근래에 와서 한국 가톨릭교회는 사회에 대해서 상당히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울 명동성당에서 가졌던 사순절 강연회가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주교님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을 연중행사로만 생각해 버린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다.「정의 없이 평화 없다」「평화를 원하거든 정의를 구현하라」고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없으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는 데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사회를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지 사회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사회를 분석 판단하고 어떤 구체적인 행동 방안을 세우는 것은 사회의 현실과 장래에 진실로 유익하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사회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는 항상 정화되어야 하고 모든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교회를 위하는 욕심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사회를 위해서는 불의을 범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의 부정을 범하게 될 수도 있다. 교회의 유익이라는 명목 때문에 사회 질서를 어기고 있다면 우리는 하루 빨리 이를 시정해야 할 줄 믿는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에 대해서 우리 신자들이 어느 정도 무관심한가에 대해서는 신자들의 교회 출판율 독서율이 어느 정도인가 보면 안다. 교회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읽지 않고, 교회 사상을 전달하는 잡지를 보지 않고 교회가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사실 관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이 사실도 몇 사람의 관심을 모을지 추정할 수 없는 일이다.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후 교회 내에 많은 제도가 변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순절 동안 금요일에 대재 지키지 않은 것을 대죄로 아는 사람이 허다하니 교회의 가르침이 과연 어느 정도 우리 신자들의 정신 속으로 침투되는 것인지 의아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한 신자가 과연 교회 운영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질 수 있을는지? 신자들의 무관심이 교회를 답보상태에 버려 두는 주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일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관심과 간섭과는 다르다. 관심이 지나치면 간섭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다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양과 수덕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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