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어느 저명한 인사(人士)의 고정집필란에서 춤에 대한 서술내용을 본적이 있다.
이야기인즉 미개한 민족일수록 춤을 출 때 허리 아래쪽을 많이 흔들고, 문화적인 민족일수록 허리 윗쪽을 움직여 춤을 춘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우리 한민족이 얼마나 점잖고 우수한 민족이냐는 내용도 곁들여 있었음이 기억난다.
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지나치리만치 서양풍속을 급속도로 받아들인 오늘의 우리 삶은 춤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닌듯하다. 모였다하면 디스코요 못추면 뒷전차지이며, 심지어는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꼬마라 해도『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가 나와도 몸을 흔드니 말이다. 언젠가 본당에서 생활할 때 어느 가정을 방문한 일이 있다.
온 가족이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이었고, 순간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가정의 꽃이라고 할수 있는 꼬맹이는 흘러나오는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재롱으로 인기를 독차지 했다. 아마도 갓 두 돌 지난 세 살짜리였던 것 같다. 지금도 가만히 상상해보면, 정말 그 자체로서 한 폭의 그림이었다고나 할까? 그렇다. 확실히 자녀는 가정에 있어서 꽃이요, 부모에겐 희망이다. 그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단계에 따라 때에 맞춰 춤을 추며 재롱을 부리는 것이 어찌 부모에게 기쁨이 아닐 수 있으랴!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든다. 때에 맞춰 재롱을 피우듯이 그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두고「아멘」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앙증스럽고도 대견스러울까 하고 말이다. 「아멘」이라고 확실히 발음을 못하고 「아응」이라 해도 좋을 게다. 그저 그 고사리 같은 손을 모두고 머리를 조아리면 그것으로 어찌 족하지 않겠는가!
조기신앙교육
모든 학습은 어렸을 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가야할 학원도 많다.
피아노학원, 주산ㆍ암기학원, 미술학원, 태권도학원…. 어디 그뿐인가! 요즈음에는 컴퓨터나 영어회화학원도 어려서 보내야 한단다. 다원ㆍ전문화된 이 험난한 세상의 경쟁을 뚫고 나가자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단다. 물론 자녀의 특성이나 적성은 고려하지도 않고 부모들 지신의 자기과시 내지는 부모들의 명예나 허영심을 채우기라도 하듯이 너도나도 덩달아 그러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배움 그자체야 결코 탓할 수가 없는 것이니 확실히 현시대에 있어서 조기교육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하겠다.
그러나 오늘날「신앙은 자유다」라는 말을 빙자하여 자녀들의 조기신앙교육을 등한히 하는 부모들을 간혹 보게 된다. 신앙은 자유니까 부모들의 신앙을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겠노라고 제법 그럴싸한 이론을 펴나간다. 글쎄다. 정말 그러해야 하는 것이 신앙일가? 이 험난한 경쟁사회를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현세적인 지적교육이 일찍 시작돼야만 할 일이라면, 한 인간의 전인적인 완성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사회를 밝히고 구원할 최후의 보루인 신앙교육이야말로 당연히 더 일찍 시행돼야만 하리라.
이론적인 설명을 못 알아들어도 좋다. 갓 젖 떨어진 어린 아기가 흘러나오는 음악의 박자나 율동감을 이론적인 설명으로 배워서 춤을 몸에 익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텔레비전이나 어른들의 처신을 보고 배우는 깃이다. 그렇다면 결코 이론일 수도 없고 생활 그자체가 돼야만 하는 신앙생활도 어린이들이 부모나 윗사람들을 거울삼아 체득해야만 하는 것이 문명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려면 어렸을 때 시작하라』(잠언22, 6:집회7, 23~24).
『부모에 의한 신앙교리교육은 자녀가 아주 어린 나이서부터 시작돼야한다. 이는 가족들이 복음에 따라 영위하는 일상생활의 증거를 통해 이루어진다』(현대의 교리교육 68항)
아낌없는 투자
일찍이 농사는 일년지대계(一年之大計)라했다. 한 사회인으로서의 인간완성을 지향하는 일반교육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느님 자녀로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신앙교육에 있어서야 얼마나 더 치밀한 계획과 오랜 세월이 요구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세제일주의ㆍ금전만능주의ㆍ이기주의 등이 만연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진학위주의 학교수업과 매스컴의 막대한 영향아래 커가고 있는 우리의 후세대들에게 한 주에 한두 시간 밖에 실시하지 못하는 신앙교육은 너무도 태부족한 상태임에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 안타까워할 뿐만 아니라 그 무슨 해결방도를 적극 모색하고 대처한다 해도 때늦은 감이 있음을 시인 할 수밖에 없겠다.
오늘 우리시대의 교육제도나 사회구조의 개선을 위한 교회의 대사회적 임무수행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우선은 우리교회 자체가 먼저 신앙교육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지금보다 더 높여야만 한다고 감히 제언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또는 가정적으로나 본당적으로나 신앙 교육에 더욱 많은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만 함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특히 자라나는 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해 교리교사 양성이나 주일학교 운영에 있어 시간이나 정열, 또는 인적ㆍ물적인 최상의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해야만 하겠다. 『교회는 인적자원이나 활력에 있어서 교회의 최상의 자원을 신앙교리교육에 제공할 것이며, 신앙교리교육을 정비하거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일체의 노력과 수고와 물질적 수단을 아끼지 말라는 촉구를 받고 있습니다』(현대의 교리교육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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