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입김이 많은 서울.
철로를 따라 역 홈에 들어왔습니다. 무조건 올라탄 열차는 흰연기를 뿜으며 달렸고 차표검사를 하면 의자 밑으로 숨어야만 하는 나! 서울역에 도착하니 밤이었습니다. 몰래 철조망 밑으로 빠져나온 나는 그날 밤은 서울역 대합실에서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다음날 새벽 배가 고파왔습니다. 원효로 외할머니댁 문을 두드리니 이모가 나왔습니다. 깜짝 놀라는 이모는 나를 데리고 외할머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전부 반갑게 맞아주시며 어머니 말씀을 하며 우시는 그곳 모든 분들, 내가 그동안 지나온 경위를 말씀드리니 더더욱 크게 우시며 부모를 잘못 만나 어린 우리들이 고생한다면서 따뜻이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집에서 이렇다할 계획없이 근 보름을 지냈습니다. 어린마음에도 나는 미안스럽기만 했습니다. 말없이 외할머니댁을 나와 이 거리 저 거리 기웃거리며 정처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보고싶어 울고 또 울고 정말 나의 눈에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밤거리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서울역이나 남산공원에서 아무렇게나 누워자며 얻어먹어야만 하는 신세,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얻어서 먹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성격은 나의 소년시절을 악몽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열차 안에서 병을 주워서 엿장수에게 받은돈 기껏해야 10원 아니면 20원 그걸로 남대문시장에서 수제비로 살아가는 내 생활, 그런생활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했습니다. 기차 브레이크였습니다. 훔친다는건 알았지만 그 다음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한번에 두개씩은 무거웠습니다.
가지고 나온것은 엿장수에게 팔면 한개당 80원 두개면 160원, 내게 정말 많은 돈이었습니다. 나는 그 돈으로 하루 저물도록 밥도 사먹고 또 극장도 가고 먹고싶은건 모조리 조금씩 사먹었습니다.
한번 두번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격언과 같이 나는 철도청에 있는 사람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어린 나의 범죄, 사회의 냉혹한 경제사가 나에게 이런 구실을 못박아 놓고 말았습니다.
서울소년원 가위탑 철창이 둘려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구속당한 슬픔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는 울었습니다. 13살의 나의 인생을 알기엔 너무 어린 나였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밥도 안먹고 전연 아무것도 먹지않는 나를 걱정하셨는지 이곳 선생님은 달래도 보고 야단도 하시면서 나의 슬픔을 알려고 하셨습니다.
나는 우리집 환경과 나의 슬픔을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나를 가엾게 생각하셔서 무척 잘봐주셨고 내 또래의 아이들도 내게 말을걸곤했지만 난 말도 잘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머리엔 고향의 동생들 또 돌아가신 어머니, 가슴속 마디마디엔 인간의 삶과 죽음에 피맺힌 한이 당시 내 가슴을 꽉 메우고 있었습니다. 규칙적인 생활, 귀엽게 자라야할 나이에 인생의 슬픔을 남보다 일찍 견디어야 하는 나는 그러한 생활속에서 앞으로의 나라는 인간을 생각해본 적도 없이 그날그날 그대로 지냈습니다. 그 후 한달이 넘어 보호자가 없는 나는 머리를 박박 깎고 소년원생이 되었습니다. 6시 기상 조반후에는 조회와 더불어 학과장에 들어가 공부를 해왔습니다. 그곳에서는 국민학교때 못배운 것을 다시 배운셈입니다. 학과가 끝나면 점심식사 그 후는 농장에 가서 저녁식사 때까지 일을 해야 합니다. 저녁식사 후면 다시 10명씩 조그만 방에 들어가 9시 취침시간까지 놀다가 취침나팔소리만 나면 자기 싫어도 자야하는 우리의 하루일과가 끝나게 됩니다. 규칙적인 이런 생활, 그러나 안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속에는 상습적인 범죄인과 방탕아가 있었습니다. 그사 람들은 전범이 세번 네번 그들의 경험담은 스릴이 있었습니다. 소매치기 밤도둑과 낮도둑 깡패 모두가 진실이라는걸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환경속에서 커온 나는 그들의 경험담은 나를 무척 솔깃하게 만들었습니다. 3개월이 지난 나는 대구로 이송되었습니다.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여서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경계하는 눈초리에 나는 마냥 부끄러워 고개만 숙였습니다.
대구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봉산동 소년원으로 트럭에 실려갔습니다. 이곳역시 같은 생활, 또 다시 나는 아무 생각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때 역시 난 말이 없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남들이 공을차고 놀때 한 모퉁이에 앉아 공상을 하며 옛날을 그리는게 당시 나의 기쁨과 위안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모두들 이야기를 합니다. 그곳 애들은 범죄이야기 외는 흥미가 없었고 나 역시 이 얘기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잘 알고 또 돈만 있으면 행복할수 있다는 관념속에 박혀있었습니다. 한달이 지났습니다. 나는 다시 동촌 분원으로 이송되어 1백명속의 수용인원이 되었고 여기서는 애들과 많은 이야기를 갖게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잊어 버리려고 애들과 말도 하고 공도 차고 웃으며 나의 성격을 변조시키려고 노력하며 지냈습니다. 설날이 왔습니다. 아침 조반상에 얹혀진 떡국을 보니 엄마생각이 났습니다. 동생들을 데리고 눈물고개를 넘어 엄마한테 세배하러 가던 생각, 끊일줄 모르는 생각속에 큰집에서의 구박도 생각나며 오로지 14살의 나에겐 빨리 커서 부자가 되는것만이 마음의 전부였습니다. 이곳의 생활도 무르익어 가는 한달후 뜻밖에도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탄날 큰집에 편지를 낸 적은이 있었지만 미운 작은집 자식에게 면회올 사람은 없겠기에 나는 무심하게 그저 보리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 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교무과에 들어서니 아! 그은 목소리, 달려가 형을 얼싸안고 우는 나를 달래며 우는 형, 비록 아버지는 다르지만 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컸고 똑같이 어머니의 돌아가심을 슬퍼한 형이었기에 부끄러우면서도 반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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