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성장 속도를 자랑하던 한국 경제 전반에 독버섯처럼 번지기 시작한 업계의 부황과 경기침체현상은 우리의 모든 생활 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고 있다. 최근의 보도 (본지 815호3면 참조) 에 의하면 여파는 교회 운영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며 부황에 잠긴 공장들은 긴축 재정을 위한 인원 감축과 아울러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근무시간 연장 등으로 신자들의 종교생활에까지 제재를 가하게 되는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신자생활과 교회 운영에 타격을 피부로 느끼는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실현시켜 나가야 할까?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아직까지 세상의 생존경쟁 원리 속에 휘말려는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인문의 생존 경쟁과는 거리가 먼 원칙적인 진리 규명에만 힘을 쏟아 왔다.
오늘날 경제 장황이 교회의 본질적인 과업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 못하던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타의이든 자의이든 간에 구원의 교회가 연관성을 지닌 문제라면 방법과 대책을 강구하는 데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지금의 현실을 신자들의 신앙자세에서부터 살펴보면, 경기 침체가 교회의 운영에까지 직접적으로 반영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신자들이 종교생활을 여가 선용과 같은 일반 생활 감정 속에서 해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구원의 교회는 그 본질상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그 역사에서 볼 때 어려움이 있을 때 더욱 성장해야 하며 성장해 왔던 것이다. 종교를 인생의「악세서리」정도의 위치에 놓고 있기 때문에 현실생활의 양상이 그만큼 빠르고 민감하게 영향을 던져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려움을 극복하여 진리와 생명을 되찾고 거기서 행복을 맛보려는 열의가 초대교회처럼 살아있을진대, 지금의 불황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지금의 不況은 우리의 신앙 자세를 다시 재정비할 수 있는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기회가 아닌가 여겨진다.
물론 종교생활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현실생활과 배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종교생활의 완성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10년 간 한국 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는 것이 사실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립교회의 기치는 드높이 울려졌고 가난과 무지를 벗고「우리의 교회는 우리의 손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내적인 쇄신이 급속도로 이루어져 왔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에 우리들의 피부 속엔 신앙과 현실의 야합이란 독소가 스며들어 왔고 신앙 자체를 뒤흔들고 교회 운영을 미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칠 때 더욱 더 성장하는 신앙의 씨앗을 되찾기 위해 우리 신자들은 각자 자신의 종교 감정을 정비해야 할 단계라고 본다.
둘째로 구조사업을 영위하는 교회 당국의 태도에서도 재고해야 할 점이 많은 것 같다. 애초에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할 당시에 교회는 아무런 세속적인 형웅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교회의 재산과 그 조직은 순전히 초대교회의 신자들의 전생명을 건 구원에의 열망 때문에 생겨난 여년간의 생활 속으로 다양하게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이다. 서구의 교회는 이와 같이 자발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비교적 안이한 운영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재산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전교지방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나 양상이 다르다. 복음이 이 땅에 도입된 후로 그 재정적인 뒷받침은 우리들의 희생이 아니고 서구의 막대한 교회 재산의 일부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교회는 서구 교회의 식민지 같은 궤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교회 경영의 합리화란 말이 자주 대두되고 있다. 그런데 교회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의 지혜를 완전히 초월한 하느님의 경영 방식에 의한 완성되고 조화된 세상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키워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회 경영의 합리화란 교회의 세속화를 부채질하는 요소가 될 것 같다.
어느 나라이든지 간에 복음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희생이란 밑거름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한국의 교회도 물론 선조들의 피가 희생의 밑거름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만의 희생으로 세상은 완성되지 않는다. 생명의 희생이 진리를 증거하였다면 그 진리를 더욱 넓게 더욱 다양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생활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즉 한국의 교회가 절름발이 교회의 인상을 탈피하지 못한 것도 이와 같은 계속적인 희생의 바탕이 없고 외원에 의지했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 교회가 앞으로 겪어야 할 진통은 마치 불실기업화란 차관업체의 현황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교회 당국은 교회를 역사적인 안목으로 직시할 줄 알아야하겠다. 충분한 기초도 없이 서구의 군주적 제도를 답습하는 데서 불실의 요인은 계속 생산될 것이다. 좀 더 적라라한 자세로 양떼를 이끌며 순박하고 끈질긴 투지로 세속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박해가 끝나마자자 힘에 겨운 교계제도를 마련해 놓고 거기서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은 지역의 영주 같이 틀어박혀서「알렐루야」를 부르고 있다면 성신은 교육적인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절망과 고통을 맛보여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머리 들 곳 없는 인자가 애착 없는 활동으로 인간사회의 모든 면에 파고들어 진리를 증거하고 고통을 같이하여 생명에서의 희망을 불러일으킨 구세사의 여명은 소비성향이 높은 군주적인 교계제도는 종교의 품위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오소서 성신이여! 우리 마음을 비추소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과 새로운 신념과 새로운 희생을 가르쳐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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