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까지의 교회는 폐쇄되었다. 대화가 없었다. 공동적 문제를 주교나 신부나 회장이나 불과 몇몇 신자(간부)들이 모여 단독으로 결정하는 경향이 적지 아니했다. 이러한 경향에서는 필연적으로 부정적 결과밖에 나오지 아니 했다. 그 기구, 그 회칙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아니했고 거듭 수정되기가 일쑤이며 교회의 일이며 신자의 일이며 교회를 위한 선의라는 이름으로 협력을 구걸해댔자 참여의식을 환기시키지 못한다. 세상에는 좋은 제도, 기구, 규약 등이 많이 있다. 협의회니 참사회니 사목회니 좋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화를 통해서 어디까지나 공동적인 참여의식이있을 때뿐이다. 사랑 없는 교회와 협력 없는 제도는 공허하고 교회 없는 사랑과 제도 없는 협력은 맹목적이라 할 수 있다. 공동적인 대화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사업을 수행하는 필수조건이다. 대화의 성공 여부에 따라 모든 문제가 결정된다 하여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대화를 거부하여 공동적 문제의 독단적 처리는 어디까지나 배타적 정신에 기인한다. 원래 독재는 지도자로서 무능력의 소치라고도 하겠다.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대화와 사랑이 그 근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교육은 전일적 인격 형성을 위한 인격적 상호관계라고 규정할 수 없을까. 완전한 인격 상호간의 관계는 대화와 사랑에서만 형성된다고 볼 때 교육의 성공 여부도 대화와 사랑에 달려 있다고 보겠다. 즉 코뮤니온의 형성이다. 이 점에서 교육은「하게 하지 말고 하기를 원하게 하라」를 그 근본으로 해야 하겠다.「하게 하는 것」은 이기적, 자기중심적(독단적)인 강제와 강요를 뜻하고「하기를 원하게 하는 것」은 대화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인격 존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화와 사랑에는 오직 이해와 관용, 나아가서 희생과 헌신이 있을 뿐 이기와 독단, 강제와 강요는 있을 수 없다. 교육은 어디까지나 인격은 사랑의 알파이며 오메가이다. 인격은 목적이며 수단일 수 없다. 이렇게 대화와 사랑을 통해서 전일체로서의 인간을 구제하는 것이 교회이며 그것을 형성하는 것이 교육을 중요시해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종적인 종속관계로 편중하여 권위주의적으로「하게 하므로」신앙과 생활을 유리시키는 교육을 지양해야 하겠다. 이 점에서 예비자 교육(교리)보다도 오히려 기성신자의「하기를 원하게 하는」(신앙과 생활을 일치케 하는) 새로운 교육과 계몽이 중차대한 문제라고 본다.
교회 운영 면에 있어서 교육적 사업(학교 교육이 아님)을 위한 예산(투자?)에는 조금도 아낄 필요가 없다. 오늘까지의 교구나 본당 운영에 있어서 중대한 예산이 어느 면으로 지출되었는가를 다시 한 번 재비판해야 하겠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 할 때 그 백성들의 교육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돈을 지출하는가.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이며 백성들을 입학 공부만 형성적으로 치루고 교회 정문으로 들어왔으나 많은 사람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만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꾸준한 교육과 계몽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가르치지 아니하고 어찌 그들의 사명 완수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크리스찬 활동에 있어서 아는 것은 힘이다. 앎을 통해서 신념을 갖고 신념을 통해서 힘을 얻는 법이다. 끝으로 천명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화 교육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와 교육은 삼위일체의 실현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길은 대화와 사랑의 극치라 하겠다. 대화와 사랑은 항상 정비례한다. 그만한 사랑에는그만한 대화가 있다.
영원한 사랑에는 영원한 대화가 있다. 삼위 상호간에는 위격적인 영원한 대화가 있다. 이 영원한 사랑의 대화에 의해서만이 삼위가 일체이며 일체가 삼위로 있지 아니할까. 말하자면 다양성이 단일성에 있고 단일성이 다양성에 있다. 다양성을 부정하는 단일성은 독재적 배타성이고 단일성을 부정하는 다양성은 대소고저 선후의 차별성을 말한다. 틀림없이 삼위일체와 사랑은 문제가 아니라 신비이다. 문제는 언젠가는 풀 수 있겠지만 신비는 풀 수 없다. 신비는 계몽주의적인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의해서 직관될 뿐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리상이며 사랑은 우리의 길이며 대화는 우리의 참다운 크리스찬의 표식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