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과 갈등의 세월이 계속되고 회사형편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자 내게는 좌절의 골이 깊이 패이면서 포기하는 마음이 짙어져 갔다.
내가 그토록 신봉해 왔던 모든 보편적인 정의(定義)와 의지해오니 인간적 성실, 개인적 자긍심은 이때쯤 해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이미 메마른 신앙의 샘에서는 목마른 정신적 갈증을 풀어줄 한 그릇의 지혜로운 생수도 떠 낼 수 없었다.
드디어 나는 사표를 던졌다. 나의 퇴진으로 사주에게 충격을 준다는 긍정적 의의를 빼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살이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비겁한 도피요, 가긍한 처지에서도 나를 바라보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던 선한 부하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표가 수리되고 그래도 창업사원에다 그간의 공로가 있다하여 나는 82년 모회사로 전보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다 쓸 수 없는 배경과 동기로 터진 사건 때문에 나는 모회사 근무 5개월 만에 아주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지극히 부당하고 억울하게 20년 가까이 일해 온 직장을 생이별한 것이다. 때문에 나의 원한은 하늘에 닿을 듯 했다. 부정하고 부도덕한 사주나 간교하고 썩은 간부들을 함께 미워했다. 정의는 어디에 숨었으며 신의 심판은 어찌 더디 오는가 하고 회의 했다. 정녕 하느님은 살아 계시고 인간 만사를 주관 하시는가 반문하고 또 반문했다.
실의에 찬 자식을 위해 어머니는 끊임없는 묵주기도를 하셨다. 지겨운 칩거의 5개월을 보내고 사죄의 뜻으로 주는 회사경비로 만학의 유학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주어 주신 것은 축성한 묵주였다. 어머니는 당신의 간절한 소원이라 하시면서 내게서 성당에 나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셨다.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대로 천주교로 개종, 대학 구내의 성당에 나갔다. 실로 교회를 떠난 지 20여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회사를 떠난 지 5년 만에 나는 천주님의 은혜스러운 선물을 받기에 이른다. 87년 회장이 자살로써 비극적 최후를 맞고 엄청난 부정이 드러나면서 나의 후임 중역이 구속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남달리 고달퍼도 성실을 버리지 않고 충직하게 인생의황금기를 바쳐 일했음에도 사주가 비정하게 나를 희생양으로 내팽개쳤을 때 나는 인간만사가 새옹지마라는 철리나 주께서 당신의 아들로 택하고 돌보심을 잊은 채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고, 나를 모함한 채 비정하게 버린 이들을 향해 증오를 불태웠었다.
그러나 주님은 간절한 노모의 기도를 들어 오셨으므로 내가 십계명을 어기고 교회를 멀리하며 지은 죄가 컸음에도 징벌을 유예하시고 나를 사악한 자리에서 떠나게 하신 다음 다섯 해를 기다리시다 심판으로 그들을 다스리셨던 것이다.
진정 어머니의 기도는 나의 허망한 인간적 욕망과 어리석음 때문에 끊긴 사랑과 구원의 다리를 다시 이어 놓으셨고 주님의 진노를 용서로 푸셨으며, 스무 해라는 길고 긴 탕자의 방황에서 교회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었다.
어찌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큰소리로 어머니의 기도에서 나온 은혜를 자랑해간증치 않겠는가? 나는 항상 어머니의 기도를 만분의 일로도 닮고 실천치 못하는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증거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있다.
※다음호부터는 경기도 부천시 최정애씨의 신앙수기 「어머니생각」이 연재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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