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8월 21일, 출생1846년 9월 16일 서울새남터에서 순교, 현재 나이 1백69게ㆍ특징, 최초 한국인성직자ㆍ이쯤 되면 1백69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대축일이다. 올해로 탄생 1백69주년을 맞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할 때는 우리나이로 26세였다.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의 대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김대건 신부의 생애는 그의 동료 순교자, 성인들에 비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셈이다. 천신만고 끝에 탄생한 첫 사제라는 점에서, 또 사제서품 후 불과 1년여만의 순교라는 점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조선교회의 슬픔이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거듭되는 대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이끌었던 페레올 고주교가 빠리 외방전교회로 보낸 당시의 편지를 잠깐 인용해보자
『내가 이 젊은 본방인 신부를 잃고 얼마나 애통해하는지 잘 아시겠지요ㆍ나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사람으로서 첫 사제며 지금까지 오직 하나인 신부였습니다.
그는 신학교 교육으로 많은 지식을 배워 동포들 위에 뛰어났었으며 열렬한 신앙과 꾸밈없고 진실한 신심이며 놀랄만한 구변으로 처음부터 일반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일신에 모았습니다. 성직에 있어서도 우리의 기대를 초월하리만치 임무를 수행하여 아주 훌륭한 신부가 되어 그가 조선인인가 의심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에게는 어떠한 일이든지 맡길 만 하였고 그의 성격이나 태도, 지식 등 어느모로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잃은 것은 무한 크고 무엇으로든지 대상(代償)못할 재앙입니다』
김 신부의 인도로 6년여에 걸친 조선입국 시도를 성공시킨 고주교의 안타까움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충청도 「솔뫼」에서태어나 경기도 용인땅 「골배마실」(양지)에서 소년기를 보낸 김대건의 가계는 증조부 김진후를 필두로 순교를 대물림한 집안ㆍ15살 어린 나이에 발탁돼 사제수업의 길로 들어선 김대건 소년은 마침내「솔뫼」(탄생지)와 「새남터」(순교지)와 「미리내」(묻혔던 곳)를 잇는 이 땅 최대 순교지ㆍ유적지의 주인공이 되었다.
84년, 동료순교자들과 더불어 성인반열에 올라 한국교회에 다시없는 영광을 안겨준 김대건 신부, 그를 기리는 순례의 여정은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부터 마카오, 마닐라, 중국일원에까지 확대되는 여건을 마련하게 된다.
어찌 생각하면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는 국내보다 이들 지역에서 더욱 진하게 남아있다는 느낌도 든다.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10여 년간 그곳에 뿌린 그의 땀과 눈물 역시 우리가 기억해야할 값진 보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자료들은 1836년 12월 3일 서울을 떠난 김대건 최양업 등 일행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37년 6월 7일, 꼭 6개월이 지난후로 기록하고 있다. 마카오를 향한 이들의 대장정은 변문ㆍ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연결됐고 다시 천진ㆍ항주ㆍ광동을 통관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유학생활을 시작한지 두 달, 마카오민란으로 김대건 일행은 마닐라로 피난을 가게 된다. 37년 다시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났고 또 한 번의 마닐라 「콜롬보이」피신으로 김대건은 마닐라와 묘한 인연을 맺게 된다.
1842년 통역관의 자격으로 프랑스 함대에 동승한 김대건은 「마닐라」「상해」「요동」「백가점」을 거쳐「변문」에까지 진출, 조선교회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때 그가 들어야했던 기막힌 소식은 「기해박해」. 1839년 기해대박해로 선교사 모두가 순교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김제준과 동료 최양업의 부모 등 2백 명에 달하는 신자들의 순교소식은 그로 하여금 조선입국을 서두르게 했다.
변문으로의 입국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길림훈춘을 거쳐 두만강에 이르는 동북국경입국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다시 「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더불어 부제품을 받게 된다.
1845년 1월15일 드디어 입국, 김 부제는 풍지박산이 난 조선교회를 수습하고 신학생을 뽑아 교육시키는가하면 조선지도를 작성하는 가운데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미 성직자를 조선교회로 인도하는 입국로를 개척한 김 부제는 다시 상해로 건너와 「김가항」에서 사제서품을 받게 된다. 때가 1845년 8월17일, 15살 소년의 몸으로 유학길에 오른 지 10년 만에 이룩한 결실이었고 조선교회의 경사였다.
그가 개척한 항로를 따라 페레올 고주교와 다불뤼 안신부가 조선입국에 성공했으나 김 신부는 새로운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러 나섰다가 체포되기에 이른다. 1846년 6월이었다. 그해 9월 이 땅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는 국사범으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받는다. 사제로 서품된 지 불과 1년, 조선교회의 슬픔은 하늘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곳은 「마카오」와 필리핀 「콜롬보이」뿐 김 신부의 눈물과 발자취가 서려있을 중국땅 곳곳은 막혀있다. 제한적으로나마 뚫려있던 「팔가자」 「상해」는 중국의 유혈사태로 미지수가 되어버렸고.
7월 5일 축일을 기해 김 신부의 믿음의 행로를 되짚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친 그의 삶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동남아순례는 마카오, 콜롬보이에 세워진 동상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신앙의 유산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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