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다. 소장님실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언뜻 보아 오십 전후의 신사분이었다. 구리빛 얼굴엔 근엄한 교양미와 믿음직스러운 미소까지 듬뿍 머금은 분이었다.
「참!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네-어서 오십시오!」하고.
소장님께서는 언제나처럼 그러한 분들을 반갑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용건을 물었단다. 그런데 그분은 명함 한 장과 신문 한 쪽을 묵묵히 내어 놓고는 의자에 앉은 채로 지그시 눈을 감더란다.
명함은 한국문협 위원이요 D대 교수로서 그러니까 왕년에 시집「자의제」등으로 빛나는 문학상까지 받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신문은 며칠 전에 K지ㆍ대구 M지 등에서 우연히 나의 졸작「검은 가을에 종은 울어도」를 기사화(記事化)시켜 전망을 보인 특집들이었다.
그래 소장님께서는 나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계셨단다. 그런데 그분은 나를 만나기도 전에 전하여 달라면서「바람 부는 마을」이란 수필 및 단편집과「백의제」등 십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를 놓아 두고 가셨단다.
나는 뜻밖이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옛날 아니 내가 대학엘 입학했을 때부터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스승 중의 한 분으로서 니힐에 물들어 케쎄라 세라를 외치던 그날의 직전까지도 사랑을 베풀어 참다운 충고를 단념하시지 않았던 은사(恩師)였으나 죽어 마땅한 나는 그분의 이름까지 가물가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제자로서 스승을 망신시킨 철면피한 놈일 뿐이다.
그러나 그분은 말했단다.「… 놈은 누구보다도 고집이 세기는 합니다. 아마 그놈이 사람을 죽이게 된 이유도 그 고집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놈의 고집이 꽃으로 승화되어 열매가 맺어질 날이 올 것으로 압니다. 제가 살아 있는 한은… 」하시면서 아주 뜨겁고 눈물겨운 여운을 남긴 채 나쁜 걸음으로 총총히 나섰다고 한다. 왜 나를 만나지 않겠는냐?… 는 갸륵한 이유도 물어볼 여유 없이 황황히 달아나시는 스승의 뒷모습을 끝가지 지켜보셨던 소장님께서는 그 후 나를 불러 앉혀 놓고 그때의 소감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 가운데에서도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헤매이시는 스승의 도(道)는 정말 존경할 만했어!… 』
그리고는 그 후 소식이 없던 그분께서 한 장의 엽서를 보내왔다. 그 엽서의 내용은 간결하면서도 어찌나 폭 넓고 깊디 깊은 바다였던지 끝이 없는 벽해(碧海)만 같았다. 나는 그래서 또 읽고 또 읽었다.
『광복군! 겨울 어느날 소식 전하고 임신한 가지(枝)들이 끝내 분만하고 말 때까지 이렇게 늦었네. 그동안 문학에 대한 집념보다 옥고(獄苦)에 의 심신 단련이 급했겠지. 부디 내일을 위한 사랑의 섭리 속에서 절망 없는 씨앗이 되어 주게나. 씨앗이 뿌리 박을 옥토만은 이 못난 스승의 품 안에도 얼마든지 있으니까.「로마」가 이루어진 역사를 잊지 말고 천려일득의 재간이라고 대기만성을 비네.
牧人으로부터』
목인은 선생님의 호이다. 나는 그 엽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는 뜨거운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머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푸르러 드높은 가을 하늘의 바다가 알찬 내일을 향하여 달리는 내 마음을 깊숙히 출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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