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ㆍ4 남북 성명을 우리는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본란은 명백하게 말한 바 있지만 우리는 이 환영의 뜻을 재확인하는 바이다. 그것은 이 땅에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체원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아전인수 격일지는 몰라도 평화와 자주의 정신, 상호 교류와 대화 그리고 일치는 그리스도 정신의 유산이기 때문에 이 7ㆍ4 남북 성명가운데에는 그리스도 정신의 승리를 우리는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것을 우리는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 정신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14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통일원칙에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그동안 우리 민족에게 사상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차츰 스며들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북한의 공산당들도 이 정신을 배웠다는 말인가. 그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정신의 우위성을 그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자주ㆍ평화ㆍ일치ㆍ대화ㆍ교류를 실질적으로 생활하도록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정신은 가장 인간적이요 인간의 목적을 최고도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제 아무리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7ㆍ4 성명을 접한 우리는 착잡한 심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게도 고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인간이 잘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 통일이 될는지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뇌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주어진 의무는 이러한 때일수록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힘있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7ㆍ4 성명이 발표된지 거의 스무 날이 지난 오늘까지도 안동 두 주교의 메시지 이외는 교회 당국의 공식적인 발언이 전혀 없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북 공동 성명은 물론 정치적인 발언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우려가 없는 바도 아니다. 정치에 직점으로 개입하는 것을 삼가야 할 교회이기 때문에 전혀 아무 말이 없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남북 공동 성명과 교회 사목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참된 평화와 일치는 희생과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고 올바른 대화는 자기인격의 완성과 상대 인격의 존중을 전제하는 데 어찌 교회의 사명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한국 주교단에서는 금년을 정의와 평화의 해로 설정하고 교회의 사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에와서 실질적으로 행동화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막상 퇴각해 버리는 격이 아닌가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과거 36년의 왜정 때 우리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가톨릭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그 타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하는 바이다. 물론 침묵이 응변보다 더 강한 발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침묵도 행동을 수반한 침묵이라야 한다. 남북 공동 성명은 3천만 겨레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8ㆍ15 해방 이후로 우리 민족을 위해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물론 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온 국민이 관심을 가졌던 사건이다.
이런 때에 한국 주교단은 긴급회의라도 소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이 회의에서 아무런 성명이나 아무런 메시지가 발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국가 운명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표명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교회의 사회 참여의 첩경이라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북 공동 성명이 불완전한 인간들의 산물이니 만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발전 경로라든가 앞으로 통일의 현실적인 가능성 같은 것은 우리에게 큰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교회로서는 정치적 통일보다 더 중요한 통일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적 일치, 감정적 일치, 생활의 일치인 것이다. 우리는 평화통일은 원해도 적화통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인으로서 또한 국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없이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되려면 양자가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북한은 개인의 자유와 양심을 존중할 줄 알도록 노력해야 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사리사욕보다 공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익을 희생할 자세를 익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통일은 요원할 것이고 피상적인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일에 남북 공동 성명에서 소수인들의 야심이나 정치적인 작회를 엿보고 있다면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남북 통일을 실현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평화적인 남북 통일만을 추구하고 그것만을 향해서 온 국민이 매진한다면, 그것만을 위해서온 국민이 일치단결한다면 여타 사소한 문제들은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는 바이다. 차제에 모든 가톨릭 신자들과 또 모든 국민은 각자의 위치에서 남북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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