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부터 4박 5일 간의 남북 적십자 제1차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고 한국 대표단 54명은 무사히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돌아왔다. 27년 간의 기나긴 단절을 깨고 양쪽의 대표들이 한 겨레로서의 대담을 나눈 것은 우리 민족 사상에 또 하나의 획기적 사실을 이룩하였다. 그 사이에 평양에서 오고 가고 한 대화나 듣고 보고 한 소식들이 모두가 다 반갑기도 하면서 섬칫하기도 하고 낯익은 것보다는 생소한 것들이 교착하는 감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또 제1차 회담의 내용으로서는 1년 남짓한 세월을 거쳐서 마련한 예비회담인 회의된 식제를 정식으로 결정 선포한 데 불과하고 주로 평양의 몇 개의 모습을 살피고 또 몇 차례의 북적 측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의 격조한 사이었기에 단번에 모든 것을 다 털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위선을 피차 간의 마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데 그치는 것이 다음 회담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본란에서는 이번 평양 회담을 민족의 대과업을 수행하는 거대한 첫 발걸음으로서의 커다란 의의와 그 성과에 만족과 경하를 아끼지 않는 바이다. 다만 앞으로의 회담 전망에 따라서 몇 가지 견해를 밝혀 보려 한다.
첫째로 인도적 차원에서 적십자 회담이 시작된 만큼 회담의 중점은 어디까지나 인도적 견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비록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같은 민족의 같은 가족이
남북으로 서로 갈려서 생사의 소식조차 모르고서 산다는 것은 진실로 인도상의 문제이다. 아무리 서로 전쟁하는 적대국 사이에도 포로의 대우나 교환 등에 있어 인간 존엄성에 입각한 인도적 처우를 하도록 주선하는 것이 바로 적십자 운동의 큰 사명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 후 20여년 간에 남북으로 이산된 천만명을 헤아리는 동족동포들이 서로 만나기는커녕 생사의 소식조차 모르고 지난다는 것은 실로 중대한 인도상의 문제이다.
이번에 남북의 적십자사가 이 문제를 들고 나서서 여러 가지의 곡절을 거쳤지만 평양의 제1차 회담을 마쳤고 서울의 제2차 본회담이 열리게 되었음은 적십자 운동의 사명을 바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십자로서 할 일은 그 본래의 인도적 사명을 벗어나서 정치적 문제에까지 침범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평양회담에서 이미 북적측의 언동은 다분히 이 회담을 정치적 단계에까지 확대혼합하려는 의도가 나타나고 있음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로써 인도적 견지를 일탈한 정치적 분위기에 휩싸이는 일이 없기를 당부하고 싶다.
둘째는 정치적 차원에서 적십자 회담을 전망할 때 우리 민족의 궁극적 년원이 남북의 정치적 통일에 있을 바에는 적십자 회담도 통일의 커다란 노선밖에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통일의 깊은 기초가 되는 인간의 문제에 그쳐야 하겠고 더 복합적 정치적 문제는 이미 7ㆍ4 남북 공동 성명에서 협론된 바 있는 남북 조절위원회 등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고자 하는 바는 과거의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의 단계로 일대 전환이 이룩되려는 시점에 있어서 너무 성급하게 통일문제에 현혹하거나 도취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현재의 남북은 이념과 체제에 있어서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있어서 너무나도 엄청난 거리에 놓여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비록 대화는 있어도 대결의식이 존재하는 한에서는 통일을 론하기에는 때가 빠른 감이 있다. 그보다는 이 단계에서는 대결의식에서 유화의식에로의 또 하나의 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통일에로의 일보를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종교적 차원에서 적십자 회담에 촉망하고자 하는 바도 없지 않다. 이번 보도에 의하면 북한에는 이미 예측했던 바와 같이 종교의 자유는 완전히 말살되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신앙의 자유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에 속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종교인에 대한 가혹한 박해는 또한 인도상의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산가족의 상봉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는 데에 아울러서 종교인의 신앙문제도 점차 관심의 초점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후일의 통일 시기를 염두에 둘 때에 정치 이념의 차이에 못지 않게 종교 신앙의 격차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을 상상해 봄으로써 알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의 종교인들도 앞으로 우리의 신앙 자세를 더욱 공고히 하여 오늘의 적십자 사명으로 연결되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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