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맞이하는 한국 순교 복자축일이지만 정의와 평화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올해의 소감은 어쩐지 여느 해보다 좀 다른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먼저 한국 복자의 순교 사실을 새삼 살펴보건대 1784년 이승훈 씨가 북경으로부터 교회를 도입해 온 후 10여년에 교세는 벌써 1만 명의 교우를 획득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로 1800년대를 전후해서 이른바 신해ㆍ신유교난을 당하여 윤지충 정약종을 위시한 많은 남녀 교우와 중국에서는 주문모 신부가 치명했다. 그 후 1839년의 기해교난 때에는 정하상 이소사를 위시한 많은 복자ㆍ복녀들과 빠리외방전교회의 노렌죠 앵베르 주교 등 성직자 3명이 순교했다. 그리고 또 뒤이은 1846년의 병오교난때는 한국의 수선사제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을 비롯한 복자복녀들의 많은 치명자를 냈다. 끝으로 제일 혹심하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것이 바로 1866년의 유명한 대원군의 병인대박해이었다. 이때에는 전후 6년에 걸쳐 무려 8천여 명의 치명자를 내게 되었다.
특히 이들 중에는 베르뉘 장 주교를 머리로 한 프랑스 신부님들과 남종삼 정의배 등 많은 복자들이 끼어 있다. 위에서 말한 바 4대 교난을 통해서 순교한 신도의 수는 유명무명을 합해서 적어도 1만 명은 넘었으리라고 한다.
이와 같은 거룩한 분들은 현세의 영욕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볼 뿐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생명을 하느님의 진리를 위해서 즐겁게 바치는 의인이고 남사이었다. 이들 중에서 모든 사실의 뚜렷한 조사를 통해 특별한 간택을 받아서 영광스러운 복자위에 현양된 분이 오늘의 103위 복자인 것이다. 다시 세분해 본다면 기해ㆍ병오의 박해에서 79위가 1924년에 시복되었고 병인박해에서 다시 24위가 1968년에 시복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 복자에 대해서 우리 교회는 오늘날까지 어떻게 대해왔는가 한 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연중 교회 행사로서 9월 한 달을 한국 순교 복자의 성월로 정하여 축일을 지내고 외부 행사를 하는 등 많은 기도와 희생을 바치면서 복자들의 순교정신을 앙양해 왔다. 특히 한때는 순교 복자를 현양하는 대대적 사업을 목적으로 한 한국 순교복자현양회의 조직체도 구성되어서 순교정신을 앙양하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에 그 현양회의 사업은 유시무종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는 실로 우리의 거룩한 조상인 복자들에게 면목 없는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요즘에 와서 한국 선교 2백주년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수선 치명 사제 김대건 신부의 시성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는 한국의 복자정신을 만방에 널리 알리고 한국 교회를 세계에 그 위신을 과시하려는 의도와 또 우리 복자들에게 대표적으로 뜨거운 정성을 바치려는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서 마땅하고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되며 그의 성취를 위해 전교회의 큰 노력을 빌어마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난에서 이미 오래 전에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더 중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란 벽두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 있어서 한국 교회가 진실로 순교복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간직하고 이를 현양함에 있어서는 오늘의 한국 사회 정세를 상대적인 표준으로 삼아야 하겠다. 즉 옛날의 한국 사회는 우리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이를 박해하였기 때문에 무수한 치명자가 생겼고 따라서 103위의 복자가 천상의 영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은 정세가 다르다. 물론 북녘의 한 쪽에는 과거의 어느 때에 못지 않게 혹독한 박해가 가해져서 이미 모르는 사이에 몇천 몇만의 순교자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의 또 하나의 다른 모습의 순교 복자가 추가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남쪽 안의 한국 땅에는 과거와 같은 종교 박해는 있지 않고 또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신교의 자유만은 온전히 누리고 있는 이 마당에서는 믿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만 하던 그 옛날의 순교란 상상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신교의 외형상으로 보아서는 그야말로 태평성세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하나의 커다란 걸림돌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가 너무나 지나친 물질주의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사회 정의와 윤리 질서는 땅에 떨어지고 온갖 불정과 부패가 흔천동지 하는 판국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우리 크리스찬은『먼저 하느님의 지상명령을받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선포하고 또 확장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정의를 밝히고 드러내고 또 옹호하는 것을 지상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 물론 이것을 실행함에는 오직「사랑」의 방법을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회의 지체인 신도들의 행동 표준은 오직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 명하는 정의를 표준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날의 복자정신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의 복자정신은 정의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는 생명을 바칠 용기까지는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불의를 통해서 더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하고 정의를 지키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만이 요구되고 있다.
부패가 있는 곳에 짠 소금을, 불정이 있는 곳에 정의의 빛을 줄 수 있는 용기만이 오늘의 당면한 복자정신의 현양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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