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나라 일본에 가톨릭교회가 소개된 지 올해로 4백 23년이나 된다. 1백 549년 8월 15일 당시 동방의 전교사업을 맡은 예수회의 프란치스꼬 사베리아가 일본 구주에 첫 발을 디딘 것이 그 효시다. 키리스탄종(切支丹宗)으로 불리운 천주교는 그 후 몇 년이 지나면서 천황의 우대신으로 실권을 쥐고 있던 織田信長의 문호 개방 포교 허용 정책의 비호를 받아가며 가히 일본교회의 황금시대는 잠깐 사이에 막을 내려야 했다. 흥진비래는 인지상사라고 체념하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박해가 시작한 것이다. 농민 출신으로 급작스레 영웅이 된 豊臣秀吉이 직전의 뒤를 잇게 되자 포교사업 억제정책을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사 상인 농민의 신분
차를 뚜렷이 하여 철저한 무단정치를 펴던 그에겐『하느님 앞에서는 모든이가 평등하다』고 설교하는 천주교가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선교사는 침략의 선발대라는 풍설까지 있었다. ▲豊臣秀吉 일가를 넘어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德川家廢도 秀吉의 포교 억제정책만은 그대로 답습했고 그 후손들은 한 술 더 뜬 박해를 통해 천주교 씨 말리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1622년 9월에는「나가사끼」에서 스피노라 신부 등 25명을 참수 처형하기도 했다. 德川家廢의 손자인 家光이 집권하던 1637년에는「九州」의 신자 농민들이 폭정에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박해는 절정에 달했다▲이 같은 박해를 겪은 후 후세에 빛을 본 일본의 순교 복자 2백5명 가운데는 3백80년 만에 한 줌의 흙이 되어 환국하는「한국 녀인」줄리아가 끼어 있다. 줄리아가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1957년부터였고 이번에「흙의 환국」으로 도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關光 상혼이 덤으로 붙은 인상도 있지만 어쨌든 순교 복녀가 이처럼 매스콤의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줄리아에 대한 화제가 화제로서 끝날 수는 없다. 줄리아의 생애와 그 순교 역정을 단순히 하나의 센세이셔널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다. 흔히「성현도 흥세추이」라는 문자를 들먹이면서 부정한 현실과 타협해 버리는 것은 줄리아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약간의 손해와 별 것 아닌 고생이 싫어『주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잔을…』남용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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