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중에는 눈을 감은 장님과 눈뜬 장님이 있다. 눈을 감았으니 못보는 것이 당연하지만, 눈을 멀쩡히 뜨고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좀 더 애처로운 감이 든다.
눈뜬 장님 하면 오래두고 잊혀지지 않는 영상(映像)이 떠오른다. 「앙드레ㆍ지드」의 「전원교향락(田園交響樂)」에 나오는 「제르뜨뤼뜨」가 맑은눈을 표정없이 뜨고 더듬거리는 모습은 무어라고 말할수 없는 아픔과 애수(哀愁)가 깃들어 있다.
그런데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내가 눈뜬 장님 노릇을 할 때가 번번이 있다. 이를테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길을 가다가 그 중의 한 친구가 지금 우리 옆을 지나간 이상한 모자를 쓴 女子를 못봤느냐고 물을 때 모두 보았다고 하는데 나만은 보지못한 것이다. 분명히 이상한 모자는 내 눈 앞을 지나갔겠지만 내 마음의 눈이 골똘히 딴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여 눈을 뜨고도 못보는 장님 꼴이 된것이다.
이런 경험도 있다. 어느날 우연히 K씨의 소개로 P씨를 알게 되었다. P씨는 생전 처음보는 사람으로 전혀 그전에 만나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뜻밖에도 다음날 아침 출근길 버스정류장 앞에서 딱 마주쳤다. 바로 어제 인사한 터이라 나는 왠일이냐고 반가이 물으니 집이 이 근처라서 자기는 매일 아침 이 시간에 여기서 버스를 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P씨는 가끔 여기서 나를 본 일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나도 P씨를 이곳에서 틀림없이 자주 보았을 것인데 어제 인사를 나눌때 까지 전혀 한번도 본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이 역시 눈뜨고 장님 노릇을 한 격이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작년에 우리모임인 청미회(靑眉會)에서 개최한 시판화전(詩版畵展) 때의 일인데 웃지않을수 없는 그러나 웃어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그런 일이 있었다. 시판화전은 우리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라 매스콤에서나 우리를 아껴주는 여러분들이 협조를 아끼지 않았고 또 장소가 사람이 들끓는 신세계 화랑인 관계로 첫날부터 전시장은 예상외로 화려했었다. 축하의 리본을 단 화분이 웬만한 꽃집을 방불케할 만큼 들어와 분위기를 더욱 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화분들이 웃지않을수 없는 웃어넘길수 없는 일을 일으켰다.
어느 중년의 두 남자가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화분의 꽃을 가리키며 열심히 중얼거렸다. 일본말이라 그런지 나는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은 전시장을 천천히 돌면서 마루 밑마닥에 나란히 놓여있는 화초를 보며 여전히 꽃에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면서 화분바로위에 걸려있는 시판화는 한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설마 설마하고 그들을 지켜보았으나 완전히 전시장을 한바퀴 돌면서 끝내 전시된 시판화는 전혀 눈 한번 주지않고 화분만 열심히 보고 나간것이다. 꽃 전시장으로 잘못 알았는가 그들 눈에는 화분만 보이고 시판화는 눈 앞에 두고도 보이지 않은 것일까. 이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관심없을때 관심밖으로 밀려나간 것은 묵살되고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이란 마음의 눈일것이다. 이렇게 생각할때 쓸데없는 것에 눈이 팔려 정말로 보아야될 것을 못보는 눈뜬 장님이 될까 겁이난다. 항상 마음의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그 일에 관심을 모두 두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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