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과 함께 낙엽의 지면 모든 식물은 동면을 위한 조락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천지는 황량한 벌판으로 화한다. 그때 사람들은 문득 자신들의 죽음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1월을「위령성월」로 정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며 교회층에서 11월을 전례주년의 마지막으로 삼은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우리 교회는 11월로 이 해의 막을 닫고 12월로 새해가 열리게 된다. 따라서 11월은「죽음」을 묵상하고 죽음이 뜻하는 것을 다시금 자신에게 타이름과 동시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추사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죽음」에 대한 것을 밝은 면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두운 면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그 점이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은 어디에나 이 죽음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희망적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도 무리가 아닌 것은「죽음」이란 아무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미지의 세계의 일이요 또 죽음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가차 없이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실로 죽음은 신비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우리로서는 죽음을 자연인 현상으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신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직 신앙의 눈으로서 현실적이며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 가는 육체의 소멸을 괴로와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한다. (사목헌장 18항)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 죽음은 진정한 평화가 있는 우리의 고향으로 들어가는 새 출발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며 크리스찬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갈망한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나는 육체와 분해되어 그리스도와 한 가지로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필립 23)라고 갈파했다.
죽음은 그리스도께 동의하는 우리의 마지막 노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서 당신의 큰 사랑을 성부께 인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것을 갈망한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에서 벗어나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바람직한 일이 되는 것이다. 진정 그리스도는 친히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셨기에 죽음의 수수께끼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해결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이는 죽을지라도 살아날 것이요 살아서 믿는 이는 모두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1, 25~26)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삶도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며 죽은 후의 세상이 없다면 인생이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 죽음의 신비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 중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면 주님을 위해서 살고 우리가 죽는다면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로마 14ㆍ7~9)
이러한 명백한 성서의 가르침은 교회의 전례에서도 전하고 있는데도 죽음에 대한 교리가 소극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위령성월을 맞이해서 다시 한 번 이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즉 죽음에 대한 교리는 크리스찬 메시지의 절정을 장식하며 천상적 사랑의 기쁨은 우리에게 희망을 키워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 교리의 밑바닥에는 종말론이 흐르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가르쳐져야 한다. 즉 죽음은 인간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의 완성을 향하는 종말론의 구체적 현실임을 깨닫게 하며 이 교리가 영원한 부유함과 평화의 본향을 잘 묘사되도록 해야 하겠다. 특히 정의의 길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는 이 교리는 크나큰 위안이며 승리인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한 가지 더 부언하고 싶은 것은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너무 자극해서도 안 된다. 지옥의 존재 이유의 적극적인 면은 역시 참다운 크리스찬과 그 밖의 선인들을 위한 축복임을 깨달아야 하겠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