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광주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적이 있다. 2만2백 원만 내면 광주에서 서울까지 45분이면 날아갈 수가 있다. 이날은 날씨가 쾌적하여 고도 4천 피트의 하늘에서 그리 넓지 않게 느껴지는 한반도의 땅덩어리를 발부터 아래로 내려다보며 『이만하면 나도 즐겁구나』싶은 느긋한 생각으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었다.
비행기 속의 승객들 표정도 마냥 즐겁고 행복해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이 땅의 현실로부터 멀리 벗어나서 삶 그 자체가 허공에 떠 있는 듯 싶었다. 비행기가 출발한지 십분 쯤 후、에어걸들이 기내 손님들에게 신문을 서비스해 주었을 때、신문사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승객들이 어떤 신문을 많이 선호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비교적 보수지로 알려진 A신문을 많이 선택한 것을 본 나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광주에서 출발한 비행기였기 때문에 나의 놀라움은 더 컸었는지도 몰랐다.
이날 신문에는 임수경양이 판문점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면 단식에 들어갔다는 내용의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으며、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임수경의 입북에 따른 나라 걱정으로 화제를 삼고 있었다.
그들은 임수경양의 입북을 크게 걱정하면서 곧 나라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안해하였으며、어떤 승객은 주식 값이 떨어지는 이유를 대면서 임수경양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다.
나는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분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발부리 아래의 땅덩어리를 음울하고도 쓸쓸한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83년에 신라 스님 혜초의 발길을 더듬어 파키스탄의 카이버 고개에 이르렀을 때의 허망했던 기분을 다시 느낀 뜻 싶었다. 그때 나는 1천2백 년 전에 신라의 혜초스님이 여권도 비자도 없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을 수가 있었는데、인공위성이 달나라에 착륙한지 오래인 지금은 한갓 이념의 장벽 때문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절망과 함께 역사의 엄청난 후퇴를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아갈 수도 돌아올 수도 없는 이 분단의 장벽은 분명 이 땅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우리를 마음속에 넘을 수 없는 높은 이념의 장벽으로 막혀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려올 때는 비행기 대신에 버스를 탔다. 토요일이라 강남고속터미널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나는 1시간 가까이 뙤약볕에서 줄을 서 있다가 가까스로 뒷좌석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4천7백 원에 4시간 가까이 흔들려야 하는 고속버스 여행은 분명 비행기에 비해서 지루하고 답답하였으나、그래도 자동차 바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이 땅의 촉감이 감미롭기까지 하였고、손에 잡힐 듯한 차창 밖의 싱그러운 풍광들이 참으로 좋았다.
고속버스 승객들의 대화는 한 결 같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임수경양의 이야기도 서경원 의원의 입북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은 잡상인 철거문제、물난리와 농사걱정、자식을 가진 학부모들의 학비 걱정、그리고 오랫동안 매듭이 풀리지 않은 교직원노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들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나라걱정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들 살아갈 이야기에 만 열중이었다. 이들은 임수경양과 서경원 의원의 입북 사실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연일신문과 텔레비전에서 곧 나라가 어떻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소리를 못 들었단 말인가. 아니다. 그들에게 임수경과 서경원 의원의 방북은 그들이 당면해있는 삶의 문제만큼 그들에게 절실하지가 않은 것뿐이다.
같은 시대、같은 체재、같은 땅위에서 살고 있는 비행기 승객들과 고속버스 승객들의 의식이 왜 이처럼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누구의 생각이 옳고 누구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어느 것이 중요한 문제인가를 가려서 생각할 수는 있다. 임수경양이 평양에 간 문제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가、아니면 철거당한 노점 상인들의 생계문제나 물난리를 겪은 수재민들의 생활대책이 중요한가.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적어도 이념보다는 생존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념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 대문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생존을 위해서、즉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이념의 문제는 생존을 위해서 극복되어야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야당국회의원 한 사람이 김일성을 만나고、여대생 한명이 평양축전에 참가한 일을 가지고 곧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보다 중요한 문제들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야당국회의원 한명이 김일성을 만났다고 해서、여대생 한명이 평양축전에 참가하고、 그 여학생을 무사히 데려오겠다고 하여 판문점에 가서 우리에게 충격적인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해서、대한민국 국민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십여 년 전 잠간 서독에 갔을 때 나는 대학의 정문 앞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머리에 붉은 때를 두르고 공산주의 서적을 팔면서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서독의 한 언론인에게、왜 정부에서 저들을 그래도 놔두는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언론인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산주의 하고 싶은 사람은 하게 내버려둬도 서독 국민들은 공산주의 하지 않는 답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어야할 때인 것 같다. 몇 사람이 입북쯤에는 끄떡도 하지 않고 의연함을 보여주는 국민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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