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변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과학의 끊임없는 발전에 따라 인간의 도덕관이라든가 가치관도 바뀌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래서 종교 자체도 자꾸만 어떤 개혁이 있어야만 발전인가?
본보 제842호 독자논단에는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한국적 가톨릭교회가 토착화하는 길이라고 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토착화가 우리 교회의 발전일진대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일종의 발전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진정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토착화인가? 우리나라의 어느 전통에 그런 것이 있었다는 얘기일까?
한국 토착 민중에는 입을 쓰지 못하는 불구자도 있지만 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자가 더 많다는 사실은 어떻게 하겠으며 결혼한 사제들의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불결하다 하여 사제 독신론을 끝까지 주장하는 한국적인(?) 그 순결성은 또 어떻게 하고 손에서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토착화라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마테오 복음에『받아 먹으시오』라고 적혀 있다고 했지만 한국 토착어에서는 입으로 받아 먹는 것도『받아 먹으시오』이다. 환자에게 음식을 숟갈로 떠 먹일 때『받아 먹으시오』하는데 그것은 한국 토착어가 아닌가?
현대는「성 도덕」하나만을 가지고 보더라도 급변하는 시대이다. 시대의 조류와 변천에 민감하게 적응해 나가는 교회를 희망한다고 해도 기준이라든가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아닐까? 교회가 인간을 위해 있다는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해 있다는 것이지 다른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에 교회가 시대 변천 때문에 영성체 방법에 대한 문제보다도 성가를「팝송」으로 바꾸느냐? 하는 것들이 먼저이겠지만 개혁이라는 것은 필요성이 절실할 때 있어야 진정한 개혁이 되고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성서 완역본 하나 없는 우리 교회에서 무슨 개혁이나 개선이나 발전을 운운할 염치는 성직자에게도 없고 평신도에게도 없다.
복자들의 순교시대로부터 1백여 년이 지나도록 구약성서 완역본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성지자들은 순교자 후예들의 신앙을 책하지 말 것이며 순교자 후예들은 선조들의 영광도 개혁을 위한 개혁도 논하지 말하야 할 것이다.
개혁을 위한 개혁은 일종의 사치에 지나지 않으며 가치 성적은 시간의 낭비이며 현시점에서 우리 교회가 향하는 바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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