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어김이 없어, 다시 구세주의 성탄축일을 맞이했다. 상가에서 서둘러대는 성탄 기분도 예년과 다름없고「X마스와 연말년시를 조용히 보내자」는 구호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어쩐지 쓸쓸해지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위축되고 풀이 죽고 맥없어 보이는 느낌은 배제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서울시가 매년 주최해 온 크리스마스 트리 점화식이 올해는 없어졌다고 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는다. 카드에는 대개 구유에 누운 예수 아기와 아기를 지켜보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그려져 있다. 어떤 카드에는 양과 나귀와 소도 한 몫 끼어 있다. 모두가 조용하고 온순한 짐승들이다. 이들 짐승은 육과 유와 사역을 제공하고 털과 가죽까지 인간에게 바쳐야 하는 운명의 짐승들이다.
▲성부께서는 구세주가 탄생하실 외양간의 환경문제를 특별히 배려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가브리엘 대천사를 특사로 파견하시어 외양간의 지푸라기들를 조금은 부드럽게 하셨을지도 모르고 동불의 광도도 알맞게 조정하시고 쥐들의 소란을 엄금하셨을지도 모른다. 대천사는 특히 순하고 조용한 짐승들에게만 입장을 허락하고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고약한 짐승들은 철저히 배제했을 것이다. ▲양을 잡아 먹는 굶주린 이리가, 빠드득 빠드득 이빨을 가는 산돼지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남까지 병신을 만들려고 모두 꼬리를 자르기를 권유한 꼬리 없는 여우도, 자기 분수를 모르고 수리의 발톱에 매달려서라도 공중에 높이 떠 날아 보려다가 非命에 죽는 거북도, 춤 한 번 잘 춘 덕택으로 짐승나라 임금이 되어 저보다 큰 짐승에게 탕탕 호령하며 뻐기다가 덫에 걸린 원숭이도, 임금 자리를 물려줄 줄 알고 병든 사자를 찾아갔다가 사자의 밥이 된 코끼리도, 약을 올려 사자를 항복시킨 후 숲 속의 왕이라고 자처하다 거미줄에 걸린 모기도「베틀레헴」의 외양간에 등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간택을 받아 외양간에 있던 짐승 가운데도 소는 역시 그 습성대로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을 반추하며 조용히 아기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다시 성탄절을 맞아 구세주가 탄생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단맛이 나도록 소처럼 반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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