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저희 가정에 자녀를 넷이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중 셋에게는 그네들 또래의 고만고만한 체력과 지력을 주셔서 주어진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을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제 또래보다 상당히 뒤지는 편입니다. 그래서 늘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 애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돌려주실 말씀이 무엇인지를 기도 중에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이 그 아이를 동정할 때 애비는 제 쓸개에 든 병인양 아픕니다. 깊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웁니다. 약자에 대한 너그러움과 완고한 자에 대한 당당함을 함께 배웁니다.
제가 『일요한담』을 통해 쳐다 본 교회의 모습은 남의 집 못난 자식을 손가락질하듯 쓴 것이 아닙니다. 아픔에 겨운 애처로운 몸부림이었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눌 분들을 찾는 호소였습니다. 나누고 섬겨야 할 교회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에 연연하기에 안타까왔습니다. 남의 이야기라면 칭찬을 했겠지만 못난 자식과 나 자신의 일이라 여기기에 먼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절망한 사람의 외마디 비명이 아니라 인간의 굽은 것마저 바르게 쓰시는 하느님의 도움을 확신하여 갈망하는 청원이었지요.
찬송은 목뿐 아니라 마음으로 불러야합니다. 말씀의 들음은 귀뿐 아니라 온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몸으로 가르친 바를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엄청난 손실이 되기에 오히려 그 다음에 하느님의 자비하신 손길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 호에서 저의 잘못된 표현으로 6ㆍ25를 전후로 순교하신 우리나라 성직자、수도자 51분과 외국 선교자 57분、그 외 공산치하에서 고통을 당하신 분들의 영광에 누를 끼쳐 용서를 청합니다. 지금 갇혀 계시는 문 신부님과 모든 동참 사제들도 님들의 정신을 이어 받았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제도나 사상도 우리를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지금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떼어 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는 내 짐을 벗어 남 지우자는 슬픈 곡조가 아니라 조국의 분단을 아파하고、가난과 소외에서 서러워하고、아이들과 조국의 미래 때문에 분통터지는 사람들의 짐을 함께 지자는 우렁찬 팡파레입니다. 아픔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과 지금 아픔을 잊은 사람들은 따라 부르지 못할 곡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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