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은 인천 소년교도소, 나는 인천에선 규율이 엄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눈치껏해서 남에게 되도록이면 잘 보이려 했습니다.
그 덕인지 1주일만에 충의 소년단 악대부로 출연했습니다. 소년원서 배운 덕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열심히 불었습니다. 「크라리넷」의 부드러운 음률속에서 나는 울적하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받았습니다.
자치생활속에 가족적인 분위기, 나는 어제의 괴로움을 잊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낮엔 악기를 배우고 밤에는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세계명작과 현대문학을 도서실에서 한권씩 빌려와서 밤새워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리다보니 많은 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낮에 훈련시간에는 소년원에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무난히 해냈습니다.
처음 충의대에 들어온 애들은 몇번씩 틀려서 기압도 받고「빳따」로 맞기도 했습니다. 「소년수」들이란 동네에서 말썽꾸러기이고 자칭 대장이라고 하는 애들만 모이는 곳이라 규율이 왠만큼 엄하지 않고는 통솔할 수 없는 곳입니다.
집에서 부모의 말도 안듣고 들어온 애들도 규율반장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것을 보니 우스웠습니다. 한번씩 행사가 있으면 맹훈련을 해야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터져서 피가 나오도록 열심히 불었습니다. 그곳에 온지 3개월만에 나는 집행유예가 있다는 관계로 김천 소년교도소로 이감됐습니다.
인천은 초범들만 있고 누범과 문맹자는 김천으로 가야했습니다. 그곳에 있고 싶었지만 나는 누범이라 할수 었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으로 김천에 왔습니다. 12월28일 차거운 바람이 운동장에 모래를 날려 지나가는 죄수들을 때렸습니다. 손과 발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추위속에서도 나는 참았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김천에서도 그곳 화랑소년단 악대부에 들어갔습니다.
김천은 인천보다 규율이 더 엄하기만 했습니다. 석달 동안의 인천생활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잠시나마 상처투성이인 마음에 한가닥 따스함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변소갈 때도 반장에게 보고하고 3인씩 조를 지어 가야했고 노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여유있는 시간엔 소년단 교본을 보고 외우고 실습해야 했습니다.
한번씩 테스트할 때면「기합」을 받던지 빳따로 맞아야 했습니다. 한참 악기를 불다가도 소년단내 비상을 걸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앞을 다투어 달려가야 했습니다.
조용한 시간이 없는 그곳은 또 합주시간이 되면 정월의 싸늘한 날씨에도 쇠붙이 악기를 잡고 얼어서 펴지지 않는 손을 훌훌 불며 해야했습니다.
꼭 군대생활과 같았습니다. 「기수제도」가 있어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나이 작은 높은기수가 오면 공손이 인사를 해야지 아니면 엉덩이에 빳따는 못 면합니다.
저녁에 감방에 들어가면 교본을 앞에 놓고 취침 나팔소리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나의 잡념을 없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마비되었습니다.
그럭저럭 징역살이도 10개월이 지나갔습니다. 15척 높은 담장을 타고 올라가는 아지랑이가 봄을 재촉하고 땅밑에 풀들이 꿈틀거리며 솟아오를 때 나는 삭발 보류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나가기 두 달 전에 머리를 기르라는 증명서입니다. 이 증명서를 받고 나는 더 열심히 악기를 불었습니다. 한번씩 합주할 때면 우렁한 행진곡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끼어서 하모니를 이룬다고 생각하니 보람도 느꼈습니다.
날이 해동하면서 사회행사에 우리 악대가 초청될 때가 많았습니다. 시가행진을 할 때 나는 죄수라는 감정을 잊어버리고 다만 여러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흐뭇히 도취되곤 했습니다.
나의 머리가 점점 자라는 것과 함께 악기 실력도 진보해 갔습니다. 어느덧 6월16일 악기의 미련과 화랑대의 이별가를 들으며 사회에 나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잃은채 그래도 목숨이 붙어있으니 내 나름대로 살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닥치는대로 멋있게 이번엔 범죄를 해도 배당을 받아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1년 일한 노임 3백16원과 열차 할인권과 1백80원 등 모두 5백원되는 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행유예는 사무착오로 덕을 보았습니다. 새벽 6시 거기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담배가게에서 신탄진 한갑을 사서 피워 물고 한모금 빨아 삼키니 골이 띵해지고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다음은 참새구이 노점에서 막걸리 한되를 비웠습니다. 맛도 모르고 남이 먹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먹어본 것입니다. 얼근히 취해가지고 열차에 올랐습니다.
창밖에는 농부들이 허리를 굽혀 모를 심다가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었습니다. 대구로 왔습니다.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다이알을 돌려「그들」을 부르니 나라는 것을 알고 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대명동으로 갔습니다.
모두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내 나이 20살 아직 이용가치가 남아있으니까 ……
이젠 생각하는 기능도 발달해서 그들이 온갖 아양을 다 떠는 것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번엔 꼭 크라리넷을 사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왕초와 조용히 만나 이야기를 했지만 손톱도 안들어가고 이젠 직접 일보지 말고 따라만 다니라고 했습니다.
나 역시 범죄가 겁이 났습니다. 일년의 그곳 생활은 정말 지루하고 괴로운 생활이었습니다.
요사이는 범죄수업이 달랐습니다. 해수욕장으로 다니며 피서객의 카메라를 넘보는 일입니다. 내가 옆에서 바람만 잡아주면 일꾼인 15살 먹은 철이라는 꼬마가 주인 안보는 틈에 타올에 싸서 바다속으로 들어가 보트에 타고 있는 공범에게 넘겨줍니다.
어렵지 않은 범죄, 순간적으로 행동으로 몇 만원씩 벌게됩니다. 그러나 범죄는 허무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결실을 볼수 있지만 범죄의 결실은 법의 심판과 몸과 마음을 저버리는 결과밖에는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자기 잘못을 알면서도 허황한 마음으로 갈피를 못잡게 되는 범죄, 인간의 삶이 무엇이기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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