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 S호텔에 가톨릭 유지들이 모인 적이 있었다. 유명정치인 L씨와 H씨의 초대였다. 물론 이분들은 교우다.
한가지 특이한 인상이 있었다면 성직자니 정치인들은 이 초대에서 제외된 점이다. 다행한 일이다. 배타적인 집회라서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부담없이 담소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명망도 높고 또 교회의 발전을 위해 저마다 무엇인가 기여를 하려는 열의에 넘쳐있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동기는 아닌 것 같았다. 교회주변엔 평신도들이 각자 종사하고 있는 전문분야에서 가톨릭신자 친목회 같은 클럽들을 갖고있다. 말하자면 여기의 「키ㆍ멤버」들이 초대된 것이다.
가령 CJC(교우언론인클럽) 가톨릭 법조인 가톨릭 의사회 교수 실업인 그리고 여류명사들의 무슨회 문인회 등 그 고유명칭은 일일이 기억을 할 수가 없어도, 모두들 그럴듯 했다. 『저런 친목회도 있었군!』하고 내심 반가운 모임도 더러 없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하는 기회에 소속 직장의 광고도 잊지 않는 분이 있어서 자못 친목은 흐뭇함을 더해주었다. 실로 다양다능한 인사들이 많았다.
만일 이들이 사명감과 열의에 넘쳐 그들의 직분과 신앙심을 십이분 발휘한다면 그것은 굉장한「파워」가 됨직도 했다. 교회로 보아도 이들을 포옹할 수 있다면 훌륭한 「신앙의 자원 」이 되고도 남을것이다. 가톨릭의 사회적 비중과 존재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이 말해 교회주변의 이런「사클럽」들이 어쩌면 약속들이나 한 듯이 하나도 온전하게 운용되고 있지 않는 현실을 본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 요란한 출발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겨우 명맥이나 지키고 있는 것이다. 월례회라는 것도, 친목회라는 것도 별로 신통치를 않다. 유난스럽게도 가톨릭 교회주변의 클럽들일수록 그 예외가 많지 않다.
왜 그런가. 왜 가톨릭신자들은 사클럽 하나를 움직이는데도 동인의의이 그처럼 흐린가. 왜 집결력이 약한가. 왜 서로를 끌로 당기는 「그래비티」(磁性)를 갖고 있지 않는가. 「멤버쉽」을 가져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실망과 회의를 한번씩은 품어 보았을 것이다.
결국은 참여의의의 문제이다. 교회는 불행히도 포용력을 갖고 있지못하다. 사제는 평신도와의 사교에 익숙치 못하며 또 사회의 분야별 전문직에 대한 적응력이 없다. 뒤집어 말하면 교회의 생활권안에 있지 않고, 저 바깥에서 무중력 상태를 즐기고(?) 있는 인상마저 준다. 성당이나 신앙은 인간생활의 향기를 높여주는 생활의 터전으로 연장되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 도리어 어떤「클럽」은 교회의 행정적 편리기계로 강요받는 경우도 없지않다. 신앙을 위한 어용화는 얼마든지 견딜만하다. 그러나 이해의 눈으로, 관료적인 그림자 속에서 클럽을 평가하려 할 때, 누구나 그 클럽에 여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교회는 평신도의 구체적인 생활권으로 파고 들어가, 함께 이웃할 수 있는 포함력을 스스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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