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신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강론이 끝날때쯤 미사에 참예해서 그 다음 미사의 강론이 시작되기 전에 나와도 미사에 참예한 효과가 있습니까?』
물론 질문을 받은 신부는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미사참예를「효과」운운한 것도 잘못되었지만 미사와 강론을 별개로 생각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화자는 그만한 것도 몰라서 어리석은 질문을 한것은 결코 아니었다. 강론은 미사의 연장이며 또한 요제일 수 있다.
성경은『태초에 말씀(LOGOS)이 있었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심장없는 생명을 생각할 수 없듯이 말씀없는 미사도 있을 수 없다. 강론은 바로 그「말씀」을 전하는 설교이다.
그런데도 화자의 복잡한 질문은 한마디로 그 강론을 어떻게 듣지않고 넘겨버릴 수는 없겠는냐는 것이었다.
신부가 핀잔을 주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화자는 분명히 그 강론을 듣지않을 수 있는 요령을 말했던 것이다. 잠시 변명을 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미사중에 강론시간이면 의례 조바심이 생기고 그 도가 지나면 꾸벅꾸벅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봄날씨 탓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졸음을 벗어나기 여간 어렵지 않다. 문득 가우루루 일어나는 소리가 나서 번쩍 눈을 뜨면 그 강론은 끝이났다. 차라리 이렇게 비몽사몽간에 강론을 들을바에는 듣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회의를 하게된다.
문제는 부성실한 화자의 량식에도 없지않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저쪽에도 있는것 같다. 우리의 충분한 관심을 자아낼만한 과제를 말하고있다면 이쪽에서도 졸고만 있을 염치가 없다. 응당 정신 번쩍 차려질 것이다.
신부의 설교는 우리의 고달픈 세속생활속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또 생의 환희와 의의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일때 설득력이 있다.「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부활제 주일에 화자는 우연히 CBS(기독교방송)「프로」에서 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몹씨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설교자는 빌라도의 무리들이 예수의 부활을 감추기 위해 온갖 추잡한 행위와 조작을 서슴치않던 얘기를 인용하고 있었다. 그 경세의 훈은 새삼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지금 그 목사의 설교 한 구절에 연연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왜 우리의 강론은 졸리느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목이 말라 답답할때 아무리 파랑새의 얘기를 해도 그것을 실감있게 들을 사람은 없다. 강론은 웅변의 경지까지는 기대할 수 없어도 그 웅도에서나 옹사력에 있어서 성실한 자세가 요구된다. 성능도 좋지 않는 마이크 앞에서 들리지도 않는 음성으로 그나마 관심조차 없는「테마」를 얘기할때 우리는 그 지루함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실로 난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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