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신앙지도에 관해 오늘날의 교회는 점차 관심도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가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비단 교회뿐 아니다. 이 나라 사회현실이 청소년을 괄호안에 떼어 놓고 있었다.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청소년운동도 과거에 비해 활발한듯도 하지만 실은 청소년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및 역사적 비중에 비하면 아직도 미급하다고 할수 있다.
청소년은 그야말로 내일의 일군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사회적 주인공으로 등장할 청소년들을 부정적으로만 봐 넘기려고 하는 타성에 박힌 우리의 현실적 감정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불신과 불안을 키워주는 근본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물론 권력과 돈을 지금 당장 활용할 수 없는 층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한 세대라고 단정하며『우리 어릴때는…』 식으로만 교육에 임할때 우리는 바로 뒤를 이어야할 세대들 잃게 되는 것이며 역사의 매듭은 건너뛰고 거기따라 혼란과 마찰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존경과 사랑으로써 청소년들의 판단을 받아들여 승화시켜주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며 이러한 자기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믿음과 사랑의 사회는 이룩되는 것이다.
아무리 교육적인 이유가 이면에 풍부하게 산재해 있다손 치더라도 표면상으로 그들의 이상과 시대적인 사고구조의 변화를 부정하게 되면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품고있는 고차적인 이유를 규명하기 전에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먼저 모방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의 신앙교육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물론 영구불편한 그리스도의 선포와 거기서 연역되는 기본교리는 본질적으로 변천될 수 없는 것이지마는 그 진리의 내용을 청소년들에게 심어주는 방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여러가지로 생각해야 될 줄 믿는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당장의 자립성취와 운영이라는 급박한 현실속에서 몸부림치느라고 청소년들의 신앙교육의 방법적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는 없다.
그렇다고 교회의 운영에만 정신을 쏟고 청소년들을 먹구름속에 버리려 둔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운영의 묘를 기해서 세력있는 교회를 키워냈다고 해도 그 교회를 계승할만한 진정한 시대적 역군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교회는 계승이 있기 때문에 역사를 주름잡으며 존재할 수 있는것이다. 운영의 묘를 통해서 교회가 화려한 세력발휘를 유감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10년후의 교회를 이끌어줄 참된 신앙인이 배출되지 않는다면 그토록 힘써 얻어 놓은 현실적인 영향력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낱 물거품으로 화해버리고 말것이다. 다행하게도 최근에는 여러 교구에서 청소년들의 신앙개발을 위한 여러가지 행사를 적극 계획 내지 지원을 하고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내일의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청소년들의 신앙 개발을 위한 노력이 지나칠까 우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행동은 항상 단순하며 어떤 면으로 볼 때 반동적인 색깔로 보여질수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반동이라는 말로 딱지를 붙여버리기 전에 그들의 활기찬 노력과 이상을 최대한으로 키워주고 정화시켜 줄 아량을 가져야할 것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사고력 싫증도 내지 않고 뻗어가는 이상을 지닌 청소년들을 고착관념으로 단정해버릴 수는 없다.
청소년들의 교육면으로 볼 때 교회는 일반사회보다도 훨씬 비중을 적게 두고 있다. 교회안에서 청소년들은 대개는 그들의 역할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고 있고 설사 활동을 보장해주는 본당이나 교구에서도 전혀 사고능력이 없는 기계적인 활동만을 인정하려 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반발은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느냐 않는냐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기성세대들도 평신도 사도직의 역할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강력한(?)요구를 할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다음세대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의 존재와 움직임에 대해서는 지극히 군주적인 견해만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성소감소 현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거듭 표명하고 있지만 성소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성소가 부족할 때는 그 만큼 평신도 사도직의 의무와 영역이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추세를 앞에 놓고 평신도 사도직을 왈가왈부하는 기성세대들은 당장 자기들의 역할에 대해 교회 당국과의 무모한 마찰에 쾌감(?)을 느끼며 욕구충족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내일의 평신도 사도직의 주축이 될 청소년들로 하여금 보다 훌륭한 사도직을 해나갈 수 있도록 키워주고 밀어주며 그들의 이상과 사고력을 최대한으로 성화시켜주는데 힘을 써야할 것이다.
청소년들을 도외시한 기성세대의 평신도 사도직의 생명은 그 한계점이 명약관화하다. 청소년들에게 의무만 강조하는 봉건적 가정의 습관이 교회내의 평신도 운동에까지 미치고 있는 이상 성소부족이나 평신도 사도적이나 간에 교회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앞날은 어두워질 수 밖에 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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