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에 있은 우리 교회의 모처럼의 적극적인 현실참여-거월 21일자 김 추기경 성명서-는 그것이 지닌 여러가지 문제성 때문에 적지않은 논란을 빚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 이런 현실참여가 한국교회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인만큼 교회가 이제 새로운 자세를 보이게 된 것으로 받아들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교회 안팎으로부터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이런 현실참여는 한국교회가 지닌 고유의 역사적사정-오랜 박해시기의 은신이 가져온 민족현실로부터의 소외와 피전교국이라는 피치못할 제약때문에 全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방인 추기경의 탄생과 함께 우리도 명실상부한 독립교구의 입장에서서 이방인 사목 밑에서는 염도 낼 수 없었던「국민적」관심을 표명할 수 있게된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지금은 2백년 교회사상 교회가 처음으로 국민적 현실을 대면할 수 있게 된 때인 것이다. 아니 이미 국민적 현실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2백년의 서전을 벗는 얼마나 놀라운 사태의 발전이랴! 더욱이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는 세상의 의화를 위해 진력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찾아보게 되거니와 오늘과 같은 「국가적」시대에 있어서는 특히 우리에게서 찾아지는 국가의식의 고조와 체제 밑에서는 국민적현실을 떠난「세상」이 따로이 있을 수 없는 즉 저번의 교회의 국민적 현실에의 참여는「한국교회」가 이제 책임과 구실을 온전히 다할 위치와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정위될 수도 있으리라.
물론 이것은 그 현실참여가 내용적으로 지닐 수 있는 문제점과 의미가 거리낌없이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은 문제의 성격-우선은 그것의 형식적인 의의로부터 미루어지는-으로 보아 지극히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솔직히 얘기해서 필자는 우리 교회의 당면한 역사적 처지와 그에 대한 작금의 대응-추기경 성명서, 또 한가지 더 첨부한다면 타지방의 일은 알길 없지만 적어도 이 고장(大田)에서 있은 이른바「정치미사」건 (교회 안팎에서 이런투로 얘기되고 있다. 곡절이야 어떻든 모측으로부터의 미사청탁이 시기도 시기려니와 이와 관련된 기타 석연치 않은 점 때문에 세간의 구설에 오르고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달갑지 않은 처지에 빠져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일 따름이다.
교회는 물론 이 세상 무엇보다 국민적 현실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이 이「세상」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땅히 교회는 또「세속」-세상이 곧 세속일 수는 없고 다만 지상의 것을 섬길때 세속이리라-으로부터 초연해야되며 때에 따라서는 맞서야 하는 것이다.
세속이 섬기는 것과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가 이 세상 곧 우리의 국민적 현실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의 현실로부터 초연한체하면서 반면 스스로 정치적 판세에 말려 들어간다면-정치적인 판국에 대한 무분별과 이 나라에서는 교회에 대한 어떤 요구가 어느 경우에는 정치적인 판세에 능히 관련된 것일 수 있다는 것쯤을 아는 명도 없다면 그것은 한국적 현실속에 있지 않는 이 고장(韓國人)이 아닌때에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리라-
그래서 세간의 비방을 듣게되고 그로부터 외면을 당한다면 이에서 더 통탄할 일이 미상불 있을성 싶지 않다)에서 절박한 교회의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위험은 먼저 한국교회가 놓인 특유의 상황으로부터 오고있다. 교회가 놓인 처지가 어떤 것인지는 지난번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주교회의에서의 김 추기경의 발언이 빚은 충격적인 반변이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과보라는 얘기가 뒤에 돌기도 했지만 오보이든 아니든 공산주의자가 우리(信仰人)의 적일 수 없다는 종교적인 발언은 그리스도 그분과의 일치에서 당연히 얘기되어야 하는 일이고 또 한 이 발언이 어떤「정치적」행위를 함축한 것이 아님이 명백할진데 국법은 양심에 따르는 이같은 종교적 확신의 자유의 보장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위성적일 수 있었고 구구한 변명이나 또는 교회의 의연한 자세에 대한 찬초을 뒤따르게 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이 시점에서의 숨김없는 현실인 것이다. 교회의 종교적인 자세에 대한 이 정치현실의 도전은 같은 정치적처지에 있다고 할 서독을 두고서는 능히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교회에 대한 한국적 현실의 도전은 본질적으로 국토의 양단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우리는 종교적인 발언을 정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정치적 작태에 돌릴 수 밖에 없다. 이런 저급의 정치풍토와 작풍은 그실 오늘 겨우 걸음마를 하게 된 한국적 교회를 위축과 본연의 모습을 잃게 할지도 모를 위태로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가장 큰 외적 원인이 될 것이다. 물론 이로써 교회는 반석위에 자리한 굳굳한 모습을 온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도 있으리라.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과연 모든 사태에 대처해서 의연했고 굳굳함을 보이기에 슬기를 다했는가? 터놓고 얘기한다면 필자는 적잖은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다.
혹자는 품을 수 있는 이런 의구심의 동기를 「정치」가 우리에게 주는 심리적 압박감의 탓으로 돌리고 그실 부질없는 것이라 할는지도 모른다. 과연 오늘날 우리의 전반적인 생활이 정치의 거의 숨막힐듯한 압력권안에 들어있음은 누구나 시인하는 사정이기도 하다.「인간」에 대하여 갖는 그것의 의미는 비본질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폭군과도 같이 우리의 생활 전반을 지배할려고 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 위와 같은 의구심을 품게 되거니와「개인」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제복의「국민」만이 찾아질뿐인 이 사회의 현실은 분명히 비정상적이고 인간상실의 비극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도 국토의 량단에 비롯된 이 생활실태가 의례히 그런것으로 당연시되거나 또는 이 사태를 정치철학적으로 긍정하며 극한으로까지 밀고 나가려는 경우조차 생긴다면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폭군의 제압은 폭군이상의 자에게만 기대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가치관이 정치지상의 사상을 압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자체는 정치의 차원을 초월한 것이다.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부정과 부패가 정치의 작폐로부터 원천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의 근감을 우리의 경우와 같이 작폐의 당사자들에게 요구할려고 할진대 의당 그들의 내적인 인간변혁ㆍ가치관의 근본적인 혁신이 먼저 기대되어야 한다. 이같은 일은 이제 정치의 차원을 벗어나는 일이다. 참된 인간은 구실의 터전이 될「개인」의 소멸과 「국민」의 비대라는 우리의 생활 현실의 한 근본적인 단면에 처하여 이제 인간의 영이 문제인 교회가 해야 할 일, 이런 세상에서 교회에 기대되는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교회는 신앙까지도 포함한 모든 가치의 계발의 터전이 될 참된「개인」가 바른-정상의 인간적인 생활을 위한 교육적인 사명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 위하여 국민전체에 관련한 어떠한 사업을 우리 교회는 했는가!) 또한 교회는 국가지상주의나 정치만능의 사상 또 무슨 제일주의 등에 대하여 대항할 책임이 있으며 그 부당한 압력이 풍조를 물리치는데 감연해야할것이다.
교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므로 정치적인 국세에 밀접히 관련돼 특정의 정책적인 문제에 개입하여 제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분석과 정치적인 평가와 정치적인 처방까지 내놓음으로써 대내적으로 불만의 씨를 뿌리거나 밖으로는 그의 선 자리를 스스로 좁히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된다. 아니, 교회는 이처럼 정치적인 꺼리와 다만 무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초월함으로써 교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표현은 교회는 정치적인 것을 초월한다는 긍정적인 자세에 내재하는 다만 한 계기를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오히려 그리고 또 비로소 정치현실까지 포함한 국민의 전반적인 생활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접촉-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런 관계를 지녔을 때에만 교회는 세상에 대한 그의 사명-의화-을 다할 수 있게 됨은 물론이다. 세상사람의 영의 구제와 세상의 의화가 따로따로의 것일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부정부패와 영적인 죽음이 같은 것을 가리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면 오늘의 한국적 현실에서 교회의 가장 초급한 일-현실참여-이 무엇이어야 겠는가 하는 것은 묻는것 자체가 쑥스러울 지경이다. 부정과 부패의 일소는 이 시점에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사명이며 책임이다. 이제 필자는 인간으로서의 정상적인-참된 생활의 회복과 부정부패의 일소를 위한 국민적 차원에서의 어떤 움직임을 우리의 교회에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오늘과 같은 어려운 때일수록 반석-진리-위에 자리한 그의 굳굳한 모습을 슬기로움을 보여줌으로써 믿는 이들에게는 실망과 좌절감 대신에 용기와 위로를 주며 믿지않는 이들에게는 진리의 소재를 알리게 될 것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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