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자제 770호 독자논단란에「책망 전에 먼저 반성 있길」을 읽고 일어난 충격을 억누르며 소신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먼저 5월 9일자 일요한담은 참으로 좋은 내용의 글이었으며 그 글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스스로 비추어보고 느낀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 자아반성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빠짐없이 뉘우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현명한 사람이며 곧 성인이라고 하겠다. 마귀할매와 같은 경우라면 우리 주위에서 교우뿐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자주 눈에 띠는 예이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남의 의사를 존중하려 하지 않고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운다. 우리들은 책망하는 사람을 나무라기에 앞서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바로 잡아야겠다.
나는 가끔 이러한 경험을 겪는다. 내 딴에는 마음을 굳게하고 신자로서의 모범된 행위를 해야겠다고 열심으로 성심껏 하노라면 오히려 주위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고 비웃음을 당한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정말 사심이 조금이라도 끼었다면 또 모르겠다. 허나 그러한 것은 천부단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어디에서 오는 결과인가?
그래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소와 같이 주인에게 고삐를 잡혀 이끄는대로 끌려다니며 생활한다면 얼마나 안전하고 마음 편히 천상을 그리며 살 수 있겠는가? 라고.
아무튼 누구를 막론하고 방법을 가릴것 없이 자신을 나무라고 책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이며 사랑에 넘치는 동정인가 가톨릭시보에서 가끔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읽는다.
사실무근한 것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상스러울뿐아니라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떠한 심정에서 그런말을 할수 있을까? 그런 기사를 읽노라면 마치『아버지 잘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만 나무라지 마십시오』하는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정신을 가다듬을수 없게 된다. 아버지의 잘못을 지적할수있는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믿는 총명하고 순박한 효자만이 할수 있을것이다.
어찌 불효자의 불평의 소리를 아버지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나는 솔직이 말해서 성직자들이 혼탁한 처세를 하고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평시에 교회에서나 교우들에게 돈독히 대해왔느냐에 따라 신부에게 얘기했다면 받아이들지 않을 신부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문제들은 교회밖으로 새어나오지 않고도 얼마든지 유대를 가질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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