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가 자유의 시대이고 19세기가 평등의 시대라면 20세기는 자유와 평등을 종합하고 조화시키려는 시대이다. 특히 2차대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전쟁없는 세계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사상과 국가이익이 대립한 국제관계속에서의 전쟁 방지책을 다투어 새 무기를 만들고 경제력을 강화하고 우방끼리 방위조약을 맺어 파괴력을 극대화 하여왔다. 그래놓고 그 무서운 파괴력앞에 전전긍긍하고 있는것이 오늘의 세계이다. 결국 큰 전쟁은 방지되었다 하더라도 평화는 더욱 멀어져가고 있다. 국가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생각해낸 것인데도 때로는 그 국가때문에 많은 희생을 강요받게 된다. 그럴때에 백성들은 과연 그 국가가 내게 행복을 줄것인가를 반문하게 된다. 그 대답이 부정적일 때에 으례 국민은 위정자를 불신하고 위정자는 기만이나 힘으로 국민을 강제하게 된다. 그 속에서 국가의 발전이나 국민의 행복이 약속될수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지난 10년동안 놀라운 경제발전과 국방력의 강화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같은 발전에는 많은 무리가 동반되어야 했다. 물론 위정자는 그것을 알면서도 내일의 행복을 약속하며 국민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그 무리속에서 여러가지 폐단이 생겼고 시행착오속에서 국민의 신망을 잃은 일도 있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10년의 강행군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피로하고 지쳤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분석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양차선거에서 가장 문제된 것은 부정, 부패였다. 물론 어느사회나 부정부패가 전혀없는 사회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문제되었다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사회의 부정부패는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위정자지 권력층에서 근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국민들의 경박한 생활풍조나 반윤리적인 부패상은 비록 외부세계에서 밀어닥친 풍조라고 치더라도 이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부정은 거개가 정치인 행정인들의 손으로 가꾸어진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이 받는 봉급만으로는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사정하에서 말단공무원들이 먹고 살기위해 부정을 하는것은 일종의 자구행위(自救行爲)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서툴게 부정을 하다가 발각되는 극소수는 가차없이 법의 심판을 받게된다. 부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위법인 것은 아니다. 적법한 부정도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고급공무원 가운데 그런 부정이 많다. 그런 부정은 벌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상을 받는 일이있다. 그러므로 부정을 없애는데도 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없어도 부정을 하지 않겠다는 정신만이 부정을 근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경박한 현실주의를 없애고 생활을 보장하며 성실하고 진실된 인간에게만 행복이 약속되는 사회로 쇄신하여야 할것이다.
부정, 부패의 근원은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에게 있고, 말단 공무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급공무원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공무원의 생활보장은 국가재정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의 공무원이 부정할 수 있는 재원도결국 국가의 재원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선 국가재정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현실화함으로써 부정이라는 암시장(闇市場)부터 없애야 할 것이다.
다음은 급변하고 있는 오늘의 국제정세에 맞추어 앞날을 선견(先見)하는 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중공의 UN 가입문제가 눈앞에 다가왔을뿐 아니라 안보이사국(安保理事國)으로까지 추진하려는 기색이 짙어졌다. 우리는 지금까지 입버릇처럼 UN 감시하의 총선거에 의한 통한론을 주장하여왔다. 그런데 만약 지금 그 총선거가 실시된다고 가정할때에 만단의 자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북괴 내에서의 자유분위기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과연 우리 국민 가운데는 사소한 감정이나 반잘로 판단을 그릇칠 사람은 없을까? 감언이설이나 던지는 미끼에 낚이지 않을만큼 철저하게 반공정신이 계몽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있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야하겠고 또 그 대책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다음은 오늘의 희망인 교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교육부재니 교육위기니 하는 말들이 나들고있다. 원래 교육은 스승이 제자에게 교양과 지식을 줄뿐아니라 스스로 존경받는 모범이 됨으로서만 이루어지는것이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교육은 어떤가? 스승이 학부형을 잡고 생활보장을 흥정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젠 직접 어린 제자와 맞흥정을 하고있지 않는가? 부교재니 개인지도니 과외수업이니 하는 것들이 흥정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뵈주는 모범이기도 하다. 대학은 어느새 학문하는 곳인지 데모하는 곳인지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고 교수들은 마치 지식을 팔러온 상인이나 공납금으로 먹여살리는 머슴으로 착각하는것 같다. 국민학교에서부터 줄곧 그렇게 배워온 탓일까? 과연 그런 사제관계에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 원인이 규명되어야 하고 새로운 교육정책이 수립되어야 할것이다.
다행히도 요즘 각계에서 신풍운동이라는 것이 일고있다. 스스로 부정, 부패를 바로 잡자는 고마운 외침이다. 교육자, 법조인데 이어 어머니들이 들고 나섰다. 반가운 각성이다. 그러나 그 구호(口號)보다는 국정의 과감한 쇄신이 시급하다. 제도의 쇄신뿐아니라 정신의 쇄신이 더욱 시급하다. 경제성장을 통한 국민소득이 빨리 선진국을 따라내기 위해서는 정신성장이 더욱 시급하다. 하느님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사상이 자유민주진영의 것이라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하느님을 지배한다는 사상은 공산진영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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