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성소주일이 오면 으례히 성소에 대한 많은 얘기들이 교회안에서 거론되어왔고 성소증가를 위한 각종 크고 작은 행사들이 신학교나 수도원이나 본당에서 치루어져 왔다. 또한 각 단체는 그들대로 소위 성소 관계자들이나 유명하다는 인사들을 한자리에 몰아놓고 꽤 심각한 것처럼 이러저런 내용들을 주고받는다. 이 모두가 다 자체로서는 좋은 일들이고 하지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것들이다. 그러나 성소문제가 이런 것들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삼스럽게 성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중대성이나 심각성을 여기서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성소가 어떤 행사나 충격을 주는 몇마디 말로서만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성소는 심각한 것도 문제점도 아닌 성소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人間則에서 보내는 응답일뿐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세말까지 계속될것이다. 그러기에 문제가 된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할수 있는 상태를 조성하는 일이라 하겠다. 현대문명이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인간을 기계화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소의 심각성을 불러일으키게 된 주된 원인이라고만은 할수없을 것이다. 물론 성소의 개발을 위해서 여러가지 기본적인 여건들이 구비되어야함은 사실이다. 즉 가정과 사회와 교회라는 전체적인 테두리속에서 청소년들이 과연 얼마큼 조화있는 교육을 받을수 있는가 하는것이 聖召를 해결하는 관건이라 할수있다면 가정 사회 교회 이 셋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중요치 않는것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본란에서는 우선 교회가 줄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성소를 개발할수 있는 대상은 재론(再論)의 여지도 없이 청소년들이다. 아무리 현실이 각박하고 인정이 메말랐다고 할지라도 비교적 사회에 물들지 않고 순수함을 보존하는 층이 있다면 청소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만될 하나의 심각한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보라. 결코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의 문제로만 다루어지기를 원하지는 않을것이다. 더구나 역설할 것이다. 진정 그들은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인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교회는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줄수 있었고 무엇을 줘 왔던가? 주는것 없이 요구만을 능사처럼 되풀이하지는 않았던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숱한 교회 경영 학교들이 하나의 단순한 기업으로만 만족할수 있는가? 가톨릭 이념의 구현은 휴지통에서나 찾아야 될까?
교회당국은 청소년교육에 너무 미온적 태도를 취해온것 같다. 학교에 지도신부 한 사람 찾아볼수 없는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사제의 부족을 무슨 큰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되뇌이기 전에 한 사제가 본당을 맡는것만큼 학교도 중요한것이다. 가톨릭계 학교에서 프로테스탄이 주도권을 잡는 넌센스가 무한정 계속될수는 없는것이다. 학교가 사목의 대상에서 제외 되어있는한 성소개발은 답보상태를 면할수 없을것이다. 교회 당국의 재고를 기대해본다.
다음은 일선사목자들과 수도자들에게 바라고 싶은것이다. 과거 어느때보다도 사제생활이나 수도생활이 어렵다고들 한다. 수긍이 가는 내용이다. 진심으로 이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과중한 업무량에 허덕이면서도 한정된 환경안에서 자기와 함게 일할수있는 동역자(同役者)를 구해야 한다는것은 이들이 해야할 많은 일들 중에서 결코 빼놓을수 없는것 중의 하나일것이다. 성소가 한마디의 권고나 비슷한 행사로서 결정지어질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바 있다.
한번밖엔 없는 젊음을 불사르고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이 인간적견지에서 결코 쉽다고만은 할수없는 것이다. 한사람의 청소년이 사제 성소나 수도성소를 받기까지는 그와 자주 접촉하는 사제나 수도자로부터 거의 절대적 영향을 입지않을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제나 수도자가 자신의 소임지에서 성소를 받을 가능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보여주는 생활은 그들의 성소결정에 있어 실로 지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봉사자로서의 맞갖은 생활은 물론이고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선택한 생활에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어야만 할것이다. 선의의 청소년들이 한 사제나 수도자의 생활을 통해서 차원높은 매력을 발견할수 있어야 할것이고 그들의 생활이 풍기는 그윽한 향기를 맡을수 있어야 할것이다. 또한 그들이 참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면 어찌 이 보배로움을 전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자신의 동역자를 확보하지 못하는 사제나 수도자 적어도 동역자를 개발하기 위한 실천적 계획마저도 구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어딘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소자들이 바로 일선에 있는 그들을 통해서 성소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성소를 결정하게 되었다면 실로 그들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한 것이라 하지않을수 없겠다. 오늘 성소주일을 맞아 일선 사목자들과 수도자들에게 분발있길 바란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