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일원뿐만 아니라 이제는 서울의 큰 거리마다「켄터키 프라이드치킨, 「맥도날드 햄버거, 여러 종류의「피자」집 등, 미국 대중음식점의 간판이 즐비하게 나붙여 있다. 88년의 올림픽과 89년도의 수입자유화 조치로 말미암아 외국의 인스턴트 식품들은 시장과 상점마다 산적해있고 판촉 활동이 요란하다. 철없는 아이들과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사먹은 것을 잘사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도시에는 자고나면 동네마다 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어떤 동네의 큰 길거리는 온통 음식점으로 만원이다.
아무튼 사람은 먹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짐승이 음식을 먹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들도 물론 선생을 위해서 영양을 섭취하기도 하고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그러한 생물학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예술적인 측면, 윤리적인 측면, 또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이 밥을 번다는 것은 목숨을 번다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그래서 자기가 먹을 밥을 구걸한다는 것은 자급자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기생(寄生)해서 사는 것이다.
내가 일해서 얻는 밥은 삶의 권리이며 자기 존재의 정당화이다. 먹기 위해 수고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인간의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이 생겨났다. 밥을 벌고 만드는(요리하는)데 필요한 많은 노동은 살려고 하는 의지와 인간의 연대감을 상징한다. 그래서 밥은 나누어 먹도록 되어있다.
인간은 밥을 통하여 인간에게 곡식을 제공하는 흙에 뿌리를 박으며 동시에 흙을 자신 속으로 합일시킨다. 흙(우주)과 하나가 되고, 법은 인간에게 신성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밥을 낭비하거나 함부로 버리는 것은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밥 속에 들어있는 가치들, 즉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힘과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의 노동을 얕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밥을 먹는다. 만일 우리가 똑같은 밥을 계속해서 먹게 되면, 우리는 메스껍기도 하고 살맛이 나지 않는다. 자기가 먹는 밥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비인간적이다. 먹을 것을 고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찬거리를 장만하고 밥을 짓는 일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이 때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사람답게 된다.
사람은 요리를 통하여 밥이 된다. 가끔 생식(生食)이 좋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야수와 달라 대부분의 음식물을 자연 상태로 소화시킬 수 없다. 요리는 음식물의 소화를 돕고 맛있게 해준다. 객지에서 헤매던 아들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손수 밥 지을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밥은 나의 행동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편식, 불량식품은 건강뿐만 아니라 기질이나 성격에도 영향 끼친다.
음식을 많이 하고 독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광폭한 면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지의 원기(元氣)가 밥을 통해 인간에게 스며들어 인간에게 흔적을 남긴다. 무엇을 어떻게 언제 먹느냐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스턴트식품과 빈번한 외식은 청소년의 정신을 황폐화 시킨다. 사람은 자기고장의 음식을 먹도록 되어있다.
밥을 혼자 먹는 것은 생물학적인 적용에 불과하다. 낯설은 땅에서 홀로 낯설은 밥을 먹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독식(獨食)이란 벌을 받든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인간적이다. 한 솥밥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서로 정을 주고받는다. 몽매에 그리워하던 사람과 함께 어느 날 밥을 나누어 먹을 때 그 기쁨이야말로 이승에서도 천당의 삶을 맛보는 것이다.
빵이나 떡은 원래 갈라 먹도록 되어있다. 같은 집안 식구끼리도 밥을 잘 나누어 먹어야 말썽이 생기지 않는다. 떡은 이웃과 반드시 나누어 먹도록 된 음식이다. 돌 떡, 생일 떡, 고사 떡과 제사 음식은 나누어 먹어야 덧나지 않은 법이다.
밥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다. 관혼상제는 인간에게는 막중한 대사(大事)다. 거기에는 잔치가 벌어지고, 밥을 나누어 먹게 되어있다. 다른 사람과 밥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나눈다. 식구란 공동운명체다. 우리는 밥을 통해서 친교를 맺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밥을 나누어 먹으면 마음도 나누게 되고 서로 가까워지고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외교관들과 상인들은 사람들을 자주 음식에 초대하곤 한다. 철학자 칸트는 일일 일식주의자로서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점심식사에는 반드시 남을 초대해서 함께 밥을 나누었는데, 식사시간이 정확히 4시간 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밥을 나누어 먹는데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풍부해진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온갖 고생을 참고 일하면서 밥을 벌고, 어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식사준비를 하는 것은 자식들이 떳떳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에게 밥을 나누어 주기위해 내미는 손길은『이 사람을 존재하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밥의 신비의 극치가 영성체이고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밥을 분수대로 나누어 먹을 줄 알아야 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