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납량은 여행과 더불어 시작된다. 개나리 붓짐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단한 여장에 스츠케스나 하나들고 훌쩍 길을 떠나는 것이다. 여정은 4~5일정도 목적지는 그때그때 마음내키는대로 정하면 된다.
사실 경험으로 본다면야 삼복 더위속에서 집보다 더 편하고 시원한 피서지가 없는것이다. 대청마루에 대발이나 드리워놓고 선풍기나 한구석에 들리며 어름에 채운 수박이나 어석어석 씹으면서 땀이 배면 한두차례 냉수나 끼얹고 젖은 몸 그대로 화문석 돗자리에 벌렁 누어 왕골자리의 차고 매끄러운 촉감을 만끽하는 그에 비길 어떠한 쾌감도 피서법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 몇일이라도 피서라는 핑계로 떠나고 싶어한다. 떠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도시와 집, 번거로운 일상의 생활과 일체의 인연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구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매연과 소음의 도시, 일상의 번거로운 일과, 격식적인 예절, 사무적인 대인관계며 가족 사이의 애증과 불화, 오해와 피곤 등 그러한 혼탁은 기실 우리를 너무도 견딜 수 없이 무덥고 따분하고 숨막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삼복더위보다는 찌는 태양의 열이나 끈끈한 습기의 불쾌감보다도 우리를 괴롭히며 무덥게 하고있는 것이다. 피서란 바로 그러한 견딜수없이 가열된 도시와 인간관계의 오탁에서의 피난이며 해방이며 세탁이라 하겠다. 일년동안 묵은 때를 바다물에 씻고 산바람에 불리며 말끔히 소제해 버리고 다시 청신한 원형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나의 납량은 여행으로 비롯한다. 모든 것을 잠시 잊고 중단하고 우선 떠나보는 것이다. 시달리던 일에서 애중의 인연에서 번거로운 일상에서 잠시 해방되어 원시의 나그네가 되어보는 것이다. 새로운 토지의 풍물과 경치 인심과 정의에 젖으며 마음내키는대로 산과 바다를 계곡과 들판을 순례하는 것이다. 일정의 계획도없다. 어디서나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머무르고 싶으면 여장을 푼다. 여숙은 되도록 싸고 허름한 편이 부담이 없어 즐겁다. 동행은 한 둘 의합하는 친구라야 되며 피차 상대방에 간섭은 금물이다.
완전히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가 지켜져야 한다.
수일전 그렇게 해서 떠난 곳이 무주 구천동이다.
구천동이란 어쩌면 구천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가진 계곡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일까? 그 골짜기의 길고 오묘한 절경과 변화는 가히 여름 나그네의 발길을 매료하기에 충분하였다. 첩첩이 우거진 산숲의 그늘과 칠봉산을 불어내리는 소소한 바람, 백옥을 깎으며 물결치는 계곡의 풍성한 물줄기는 살을 예일 듯 청량했다.
한밤중 내내 비소리처럼 귀를 때리는 계곡의 물소리에 잠을 설치고도 머리속이 맑기만한 것은 바람에 실려온 산의 정기 때문이거나 물의 천연적 음률때문이었으리라.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하룻밤 하룻낮을 노호하던 폭풍과 빗줄기에 하릴없이 여숙에 묶인채 잡담과 낮잠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더위는커녕 오히려 으시시한 한기에 가지고 간 옷가지들을 있는대로 걸치고 주렁거리던 품이 마치 피난민 수용소 같은 인상이어서 요절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 매미소리 낭자하고 울밑에 무궁화가 지고 있으니 여름도 끝나가고 있다. 이 남은 잔서는 밤을 지새던 구천동 계곡의 물결소리와 노호하던 산촌의 폭풍우의 추억으로 씻어내면서 밀린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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