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ㆍ6일의 충청남도 일대에 내린 폭우로 말미암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부여 한 군내의 피해만도 69명의 인명사망과 14억원의 재산손실과 3천8백명의 이재민을 내었다. 이 끔찍한 피해의 원인은 389mm의 호우로 인해 산사태, 제방결괴, 강물범람 등으로서 불가항력적인 천재라 할 수 있고 희생자나 이재민 자신들의 탓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분들에게는 정말 애도와 동정의 마음을 금할수 없다. 더욱이 부여군내 규암교회의 현지보도에 의하면 신자들의 피해가 우심하여 전체신자 5백세대 중에 그 20%나 되는 1백여 세대의 교우들이 집과 전답을 잃고 복구의 힘없이 허둥지둥하는 참상이 보도되고 있다. 그곳의 본당 신부는 그들의 구호를 위해 불철주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있고 오죽 딱하면 독일「미세레올」에 구호의 손을 호소했겠는가. 또 소관 대전교구청은 심지어「로마」에까지 구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나 일반국민의 구호책은 아직도 미흡한 형편에 있고 특히 우리 교회 측의 구호의 손길은 지극히 미소하다고 애원하고 있다. 특신교회 측으로서는 상당한 구호가 뻗쳐오고 있는데 비해 우리 교회 측의 구호가 너무나 미약함이 대조적으로 드러남으로써 이재민교우들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하고 부끄럽게 하고있다는 현지 공소회장의 감회는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외침이라고 할수있다. 우리는 한재나 풍수해 기타 사고 등으로 인한 불의의 많은 피해를 당할때가 허다하다. 또 그럴때마다 정부나 구조단체나 일반시민이 구호물자와 동정금을 많이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일이 해마다 몇차례씩이나 연중행사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때에 교회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구호활동에 봉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으로 한번 교회와 구호사업과의 관계를 검토해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 세상안에서의 그 예방책에 힘쓰는 것이 제일 좋은 대책일 것이고, 따라서 위정당국은 이를위해 사전 예방책에 역점을 두어야함은 물론 사고시에는 전적으로 정부책임하에 구호책을 강구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본란은 정부 당국이나 기타 단체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교회의 입장에서만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에 있고 그 구원의 방법은 사랑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 구원이란 인간의 영혼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인 전 인간의 구원에 있다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 집을 잃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빼앗긴 인간이 있다면 교회는 먼저 그 인간의 육신을 구하는데 착수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그 영혼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대상에는 신자건 아니건은 문제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난한 사람과 불쌍한 사람들을 먼저 도와주고 보살펴주며 또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게끔 그 사명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시라도 이 근원적인 사명을 망각하고 외면적인 행사나 성전꾸미는 일이나 것치례에 치중하면서 마치 교회의 세력이나 권위를 올리는데만 급급하는 말하자면 교회를 위한 교회의 형태에 빠진다면 이는 교회의 궁극적 사명을 망각함도 이만저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가난한 이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셨고 병든 자ㆍ장님ㆍ벙어리 등의 불구자 등 가장 불쌍한 사람들에게 먼저 구호의 손길을 보내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교회의 사명을 단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모범을 보여주신 것에 틀림없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실상은 어떤가? 이 세상에는 가난한 이와 불쌍한 사람이 허다하다.
그러나 일시에 불의의 재해를 만나 생명과 재산을 잃고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처럼 자기탓 없이 불쌍한 처지에 놓여있는 이는 없다. 그런 재해를 당했을 때에 우리는 과연 즉각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구호활동을 전개했었던가. 이것은 이번의 부여 수재민 구호현상에서 앞에서 인용한 그곳 공소회장의 애타는 호소의 소리로서 해답이 되고만다. 소위 교우촌이라는 곳에서 천주교에선 아무소식이 없고 개신교회 측으로부터 후한 구호를 받았을때의 심경은 짐작할수 있고 또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구호모습이라고 할수있다. 그 후에 우리교회 측에도 각곳에서 구호금품의 모집과 전달의 소식이 보이기는 하나 이런 긴급한 사태에 대해 임기웅변하고 때늦지 않는 기동적인 구호의 방법에서 너무나 소홀하고 비효율적임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재해자에 대한 구호대책을 좀 더 제도적으로 고려해야 되겠고 또 그것을 항구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교무금이나 헌금 등으로 재정을 염출하고 있으나 이 교회예산 안에서 반드시 구호기금으로 일정한 비율의 경비를 미리 책정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상비기금이 있어야만 비상재해시에 응급구호의 조치를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교회의 근본적 사명인 사랑의 구원이 실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일반신자들의 각기 자발적인 구호의 손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평소부터 가난과 재난으로 굶주리는 불쌍한 이에게 대한 애긍과 시사의 사랑의 실천이 교무금과 헌금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항구적 제도화를 모색하는 것이 절실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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