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고、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38-44).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노라면 탈리온법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생존경쟁을 포기하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과연 인간으로서 실천 가능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일까? 아니、우리가 질 수 없는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한다면、그분은 결국 거짓말쟁이?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자? 아닐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기에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고、또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하나의 법칙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나라에 사셨다. 그분은「때가 차자」이 땅위로 이민을 오셨다. 이민을 오신이상、(죄 외에는)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이 되셨다.
그라나 우리와 똑같은 조건 밑에서 사신 예수님은 천국의 법칙으로 사시고자 했다. 아니、그분은 이 세상위에 천국의 문명을 건설하고자 하셨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에서、하느님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결국 같은 하나의 하느님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초월성(transcendens)과 내재성(Immanens)이다.
하느님은 절대타자로서 영원한「너」이시다. 그분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면서 이 세상을 무한히 초월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거룩한」분이 아니시던가? 동시에 하느님은 우리 역사 속에 개입하신다. 태초부터 우리와 손을 잡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으면서 역사 속을 걸어가신다.
그 어른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기묘히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세상 역사 속에 사셨을 뿐 아니라 아예 인간자신이 되신 예수님이 아니면, 하느님의 내재성이 더 완전히 실현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서는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 중에 하나가 되신 그분은 이 땅위의 현실 안에서 철두철미 하느님의 초월성으로 사셨다. 그분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으며, 이세상의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법칙으로 사시기를 가르치셨다. 그래서 마태5장은 돈과 미움이 지배하는 이 세상 법칙 앞에서 하느님 나라 사랑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상황까지 갈 수 있으며 그 최악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살아야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안에 살지만, 이 세상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고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지금 이 역사 안에 현존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마태5장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점이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것이 아니다. 때문에, 역사한가운데서 살지만 세상 밖으로 초월할 줄도 알아야한다. 교회 안에서 이미 천국의 싹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대에 따라 교회의 내재성과 초월성이 각각 다르게 강조된 것 같다. 중세기를 접어들면서 수도영성이 깊어질 때, 교회의 초월성이 잘 드러났다. 세상을 떠나 산이나 사막으로 들어간 은수자들에게서 이 땅위에서 이미 천국의 문명을 건설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중세기말, 성직자들이 정치권력과 밀착해 있었고, 실제로 교황은 삼중관을 쓰고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런 교회의 내재성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에 반하여 20세기에 들어와 교회의 내재성이 제대로 정작하기 시작한다.
노동, 가정과 결혼, 정치와 문화… 이런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부터 정치적 불의를 폭로하면서 인권을 부르짖고 우리 현실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으려고 했다. 반가운 일이다. 교회가 성숙되였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구름 잡는 소리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흙속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여름의 더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한 입북사건、교회의 병원、학교、언론기관에서 일어나는 노사분쟁을 보면서 민족의 맥박소리에 동화되는 교회에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또 한 가지、더 생각되는 점이 있다. 교회의 내재성이 이렇게 구체화되면 될수록 교회의 초월성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밖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치、통일、정의로운 분배…교회는 이런 가치들만을 궁극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영원을 바라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땅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고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히브13、14).
지금까지 집필해주신 진교훈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10월 한달은 부산교구 사목국장 권지호 신부님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권지호
<신부·부산교구 사목국장겸 성소국장>
◇1951년 경남 진해 출생
◇1977년 사제서품
◇1980~84년 로마 울바노대학 교회법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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