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따뜻한 햇볕이 정지하듯 엎디어 있는 지붕과, 들녘에 그득히 머물며 빛바랜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다.
마당의 기다란 장대 끝에는 지루한 일상을 채워 나가듯 빨래들이 깃발처럼 날린다.
어린아이 기저귀, 물방울무늬의 윗저고리, 젊은 노동자의 작업복…. 햇살의 광채가 풍부한 요즘에는 빨래들의 조용한 휘날림도 애잔한 행복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마당을 왔다갔다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가을에 젖어들었다.
기도는 자신을 떠나 상대방에게로 향하는 것이라는데 이 가을에는 깨어 기도하는 신앙인이고 싶다.
『주님 올해도 여전히 당신과 함께 가을은 왔습니다』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도 건강한 하루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매 순간순간 나즈막하게 그분께 어린 아이처럼 기도하면 삶이 내게 내려준 길을 걷는 게 밋밋한 것만은 아닌, 하늘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게 해주는 것임을 나는 믿는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내 영혼의 빈 뜨락에도 미세한 것들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케 하는 것도 가을이 내게 내려준 크나큰 은총이다.
아아! 하느님 당신은 나를 사랑으로 빚으시어 이 그림 같은 가을날 이런 가을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지요? 가장 아름다운 솔로몬의 노래인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의 임을 만나거든 제발 내가 사랑으로 병들었다고 전해다오(아가5, 8)』라는 아가의 신부처럼 나도 신열을 내며 아름다운 지병을 앓았다.
그리고 집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창문 사이로 바람이 하얀 박하 향내를 품고 날아 오면 잊혀진 친구, 나의 이웃에게 한 영혼이 다른 영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편지를 쓰고 싶다.
날지 않는 사람들은 꿈 꿀 수 없고 꿈꾸지 않는 사람들은 날으는 시늉만으로도, 피 흘리는 세상에서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사랑의 고리 역할을 한다. 길고긴 편지에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한마디도 그러넣고 코스모스 잎 끝자락이 파르르 떨고 있다는 이야기, 까아맣게 익어가는 해바라기의 애절한 사랑도 줄줄이 엮어서.
바람이 불어오면 가끔씩 두 손 모아 나의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싶다. 언젠가 키가 작은 꽃대에 매달린 향기로운 노오란 꽃을 보았던 기쁨을 아직도 소중하고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나는 서로가 거리를 두는 일에 동의하며 지내온 그동안이, 순수하게 주님께 남아 있게 한 이유였음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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