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성탄하시던 날 밤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늘 높은 곳에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울려 퍼진 천사들의 찬가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肉化)하여 사람이 되신 것은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고 세상에 평화를 주기위한 것임을 천사의 노래로써 알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구세사업의 완성도 그런 뜻에서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당신의 생애를 마치기 전에 제자들에게 들려준 기도를 들어보자.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요한17, 4)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요한14, 27)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평화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우리 모두에게 최후의 유산으로 주신 최상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의 이 평화는 개인만이 받아 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에게도 전해 주어야 할 평화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루가10, 5~6)라고 하셨다.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누릴만한 선의의 사람의 관계 안에서만 평화가 전해질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은총과 평화가 인간에게 수용(受容)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전제된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으심으로써 비로소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신 다음 그리스도는 은총과 평화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치고 계신다 (갈라디아5, 22). 성령을 통하여 작용케 하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은총과 평화를 남에게도 누리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고, 성령의 감도(感導)를 따라서 살 때 은총과 평화를 수용(受容)하게 된다. 그러한 삶을 증거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평화를 전하고 심어주는 것이 된다.
평화의 실상
우리는 평화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화를 『질서의 고요한 흐름』이라고 정의하였다. 완전한 질서 속에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완전한 질서를 빼고 평화는 생각할 수 없다. 또 평화는 완전한 질서의 결과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리고 질서의 고요(靜寂)란 외적 적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인 것이다.
인간이 갈구하는 평화는 내적 질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질서의 회복자로 세상에 오셨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인간내면의 무질서를 바른 질서에로의 복귀를 제시해 주신 분이다.
평화는 물건을 주고받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으로 바는 은총의 힘으로 무질서에서 질서의 생활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바르게 사는 질서의 삶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제시한 것이다. 하느님의 법, 하느님이 정하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평화의 길을 제시했건만 우리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질서에 역행하는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세계성체대회의 주제인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인간의 참 평화 달성을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그분과 같은 삶을 살고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무질서의 실상
원죄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인간의 내면은 오늘도 무질서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우리의 삶 자체가 그대로 증명해 주고 있다. 교회는 고래로부터 인간내부에 있는 악의 뿌리를 일곱 가지로 지적해 왔다. 그것을 칠죄종(七罪宗)이라고 불러 왔다. 즉 교만, 인색, 미색, 분노, 탐욕, 질투, 해태를 지적해왔다. 아무도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인간을 무질서로 몰고 가게 하는 악의 원동력과 같은 것이 인간에 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내면의 무질서 : 인간내면의 무질서는 개인이나 집단 사회생활 모든 면에 반영되게 마련이다. 몇 가지 사실을 들어 보자.
지성의 무질서 : 진리를 탐구한다는 지성의 세계에 왜 인간은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을까? 여사 속에 무수한 사상이 있었고 서로 다른 주장들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얼마나 갈라놓았던가? 오늘 이 땅에서도 남북이 분단된 것도 해방 후 오늘까지 정치적 사상적 혼란을 지속시켜온 것도, 오늘의 대학가가 진통을 겪고 있는 것도 모두가 지성의 무질서를 의미한다. 지성의 귀착점인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거부하고 각자의 이성(理性)에만 의존할 때 지성의 무질서는 세상 종말까지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정치의 무질서 : 정치의 무질서는 지성의 무질서에서 파생되기도 하지만 권력의 탐욕에서 정치는 언제나 무질서를 거듭한다. 독재정치나 민주정치나 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의 욕심이 작용하는 한 정치는 안정될 수 없는 법이다. 오늘 우리의 정당정치의 갈등모습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군사정권, 5공 비리, 6공 비리 선거풍토, 야당의 생리 등 이모든 무질서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경제의 무질서 : 30대ㆍ50대 재벌의 형성과 비리, 부익부 빈익빈, 노사의 갈등, 부동산 투기, 정경유착 등 물질과 재산을 둘러싼 경제적 무질서, 재산 때문에 부모와 자녀 간, 형제ㆍ친척 이웃 간에 계속되는 갈등과 반목의 무질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회적 무질서 : 이혼ㆍ낙태ㆍ퇴폐향락ㆍ살인ㆍ강도ㆍ인신매매ㆍ폭력ㆍ마약 등 무서운 사회 민생의 무질서는 그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도덕의 무질서 : 지성의 무질서,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무질서 모두가 도덕의 무질서를 의미하고 있지만 도덕의 무질서로 규정짓는 근본은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유린하는 모든 행위에 있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로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하는 한 도덕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우리는 이렇게 인간 내면에서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무질서 속에 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질서에 역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결과 우리는 평화를 못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성체대회의 주제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로 결정한 것도 그리스도만이 참 평화의 구심점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재확인하고 세상 앞에 그것을 증거 하고자 하는데 뜻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에 의한 질서회복
먼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일곱 가지의 악의 경향(七罪宗)을 어떻게 선(善)의 방향으로 통제하느냐가 평화달성의 근본이 된다.
인간내면의 질서회복
무질서한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지혜롭고 조화 있게 통제하는 것을 수신 (修身)이라고 한다면 이 통제의 능력을 어디서 보완하느냐이다. 우리에게 있어 그 힘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은 그 힘을 주시고 자기 통제의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 하느님의 은총의 힘없이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통제할 힘을 못가진다. 그리스도는 또한 통제의 원리로서 사랑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 내면의 무질서는 결국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결함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자연법의 질서회복
하느님은 우주의 통치를 위해서 자연의 법칙(물리법칙)과 정신의 법(자연윤리법)을 가지고 통치하신다. 인간은 이 자연의 법에 순응할 때만 행복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역행하지 말아야한다. 인간이 자연에 역행하는 것은 창조주에게 반역하는 일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다.
하느님의 법, 그리스도의 법질서 회복
하느님은 인간의 실천법으로 십계명(十戒命)을 제정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이 법을 완성시키려고 왔다고 선언했다. 하느님의 뜻을 명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계명(戒命)이다. 이 실천 계명에 순응하지 않는 한 하느님의 뜻에 순응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계명을 유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그리스도 법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일 뿐이다.
성체ㆍ그리스도와의 일치
하느님의 질서회복을 위해서 또 질서회복에 의한 참 평화회복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질서회복을 따르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 종말까지 인간 안에 머물고, 인간이 그리스도와 가시적(可視的)으로 일치하기 위해서 성체성사를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빵의 모양으로, 우리의 음식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주신 것은 하느님의 기묘한 사랑의 표현으로 우리는 믿는다.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여 세계 모든 신자들이 몸과 마음으로 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세상 앞에 증거 하는 신앙의 극치적 행위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4년 동안 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 평화회복의 실천행동으로서 「한마음 한몸 운동」과 「나눔」의 운동을 실천해 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형제로 결속하여 사랑으로 가진 것을 나누며 산다는 것은 오늘과 같이 대립과 갈등, 이기주의와 폭력이 날뛰는 사회에 놀라운 신앙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이 못하는 일을 우리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면서 또 성체대회를 거행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세상에 평화를 심고 있는지 재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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