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성월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해마다 복자성월이 되면 순교선열들을 현양하기위한 행사가 수없이 벌어져 왔으나 거의가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습관화된 느낌을 주어왔다. 무기력한 행사내용을 반복함으로써 순교선열에 대한 신자들의 숙의를 오히려 감소시킨 결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시성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시성의 필요성만을 주장했을 따름이지 우리의 소망을 구체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밝히지는 못했던 것이다.
금년에도 복자성월의 외적 행사내용은 예년과 별차이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김대건 신부의 시성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김대건 신부의 시성에 대한 론의가 처음 대두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탁상공론에 그쳐버렸지만 금년의 움직임은 다소 지연성이 있을 수 있는 시성운동이라고 생각되며 늦은감이 있으나「무능한 후손」이란 오명을 씻어보려는 결의를 뚜렷이 밝혀주는것 같아 어딘지 든든한 느낌이 든다.
이에 우리 80만 한국 가톨릭교회의 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건 신부의 시성운동에 대한 지난날의 반성과 아울러 좀 더 효과인 방법을 강구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피부로 접할 수 있는 순교선열들 중에서 성인을 모시고자 하는 원의는 모르긴 하지만 박해직후부터 싹튼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들의 마음속에 산발적으로 싹트고 있던 이런 염원은 1백3위의 복자를 이 땅에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자부심과 한국 신자들의 영광을 세계에 알려줄 수 있는 성인을 한분도 모시지 못했다는 사실을 한국의 신자들은 안타깝게 생각해왔던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속에서 시성에 대한 필요성은 복자축일을 맞을 때마다 대두되어 왔지만 그때마다 시성의 필요성만을 막연하게 주장하고 그 책임을 부국의 무성의에만 돌리고 한국교회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희미하다는 열등의식속에서 우리의 달래왔던 것이다.
지난날의 우리의 태도를 두고 이번 기회에 근본적으로 시정해야할 점은 성인을 만드는 것은 교회당국의 과제가 아니라 후손 전체가 떠맡아야할 성질의 것이라는데 있다. 교회가 성인을 추대하는 의도도 후손들이 선조의 탁월한 덕행을 추앙하고 본받으려 할 때 그분이 가신 길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이란 것을 확인해주고 두둔해주며 결려해주는데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덕은 성인이 닦고 성인을 만드는 자는 후손들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여기에 리유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성의 열쇠는 당국의 판정보다도 대가의 숙망에 달려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지녀왔던 태도 즉 김대건 신부와 같이 훌륭한 분을 성인품에 올리지 못한 것은 당국이 무성의해서 그렇다느니 혹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대해서 외적세력이 미약해서 그렇다느니 등의 무실임한 발음에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행하게도 이번 시성운동의 구심점이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였다는 사실은 시성운동이 올바른 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산증거가 된다고 보겠다. 그러나 이 일은 단순히 서명운동과 교황청에의 호소만으로 끝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은 좀 더 조직적이고 사무적인 절차를 계속적으로 밟아나가야 실효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80만 신자들의 서명을 받아 교황청에 80만의 이름으로 호소를 했다고 해서 우리의 뜻을 교황청이 충분히 납득했으리라 믿고 교황청의 허사만을 기다린다면 모처럼의 시도가 또 하나의 실망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서명운동만으로 일을 끝낸다면 교회당국이 볼 때 이것은 구호로만 끝나는 형식적인 발음으로밖에 간주될 수 없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생활이념과 나아가신 길이 우리에게 있어서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성덕의 길이라는 점과 나아가서 그분의 덕행이 우리의 피부안에 살아움직이고 있고 그 힘으로 우리가 이 시대의 온갖 비그리스도적인 요소들과 투쟁하며 살고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할것이다. 따라서「성명」은 단순히 외적인 동의가 아니라 그분의 성덕을 이 사회에 현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앞장서겠다는 내적인 약속이 되어야 할것이다.
수년전에는 간혹 시성비용에 대한 염려를 앞세워 시성의 불가능성을 일가일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시성운동에 있어서 서명운동의 참뜻을 깊이 알아듣는다면 이런 문제까지 서명한 신자전체가 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고 80만 신자가 여기에 적극 참여한다면 위와같은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처럼 흭기적으로 전개되는 이 사업이 진정코 올바르게 전개되도록 빌어 마지 않는 바이다. 또 한가지는 순교선열들을 현양하려면 그분들의 거룩한 뜻을 세상에 밝혀주는데 첫째 목적을 두어야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선열들이 이 땅에 신앙의 피를 뿌린 근본적인 의도는 이 땅의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으로 성화시켜야겠다는 집념에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순교선열들의 정신이 범국민적인 추앙을 받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순교선열들의 영웅적인 덕행을 국민에게 주지시키는데 과연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생각해 볼 때 부끄럽기 그지없다.
김대건 신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우리나라 국민학교 교과서에까지 나와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역사사건의 기록만으로 그치고 있다.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 자신도 김대건의 일생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무지하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이 갈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교사들에게 김대건 신부의 일생을 감명깊게 알아들을 수 있는 팜플렛이라도 보내주었는가 하는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할 줄 안다.
물론 국민교육에 어느 특정한 종교적인 의의을 전반적으로 주입시킬 수는 없지만 김대건 신부가 지녔던 애국심과 그 애국심의 실천경위라도 정확하게 알려줌으로써 나라를 사랑한 참된 인간의 길을 널리 보급할 수는 있을것이다. 물론 종교적인 덕행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느냐는 문제를 따진다면 그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끝나버리겠지만 범국민적인 여론과 김대건 신부의 인생관을 어떤 관점에서든지 국민들이 추앙하고 있다는것은 시성의 가장 첩경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사회의 분업화와 인간의 익명화로 모든 인간이 소외감을 느끼며 비인간화를 부르짖는 현대에 와서 선명하고 뚜렷한 주관을 지닌 영웅상을 부각시켜 주는 것은 비인간화에 도전하는 현대인들에게 참신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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