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우산으로 가리기엔 너무 거센바람이 내 앞으로 마구 불어닥치고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애써 자꾸 쓰러질려는 우산대를 꼭잡아 굵은 빗줄기를 막으며 넓게 트인 해변가를 걷고있었다. 아주 우울할 때나 아주 즐거울 때만 줄곧 찾아오던 정이 깊은 내 바닷가다. 어둠이 조용히 일렁이며 해변은 억세게 내리치는 빗발을 아무말 없이 받고있었다. 깊고 푸른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채.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 이렇게라도 해야만 난 그분에 대한 마음을 조금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왜 지금 이 시간도 이렇게 그분을 생각해야 되는 걸까?…
사랑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 고독감 때문에 뒤범벅이 된 상심을 처리하지 못한채 난 복잡한 생각에 잠기기 싫어 지금까지의 생각을 떨어버리려는듯 그 자리를 떠나 다시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그분을 알게된 것은?.
그러니까 66년 10월 초순경이다. 가을이라고 하기엔 아직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어 꾀 무더운 날씨였다. 내가 알고있던 K학원 원장님이 직장을 알선해준 S출판사를 찾아나섰다.
전혀 가보지 못한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걷다보니 길이 몹시 험하고 걷기엔 짜증이 날만치 지루했다.
논ㆍ밭을 지나 겨우 S출판사를 찾아 정문앞에 섰을땐 까만구두에 먼지가 뽀오얗게 한꺼풀 폭 쌓였었고 맥이 풀려 졸음이 오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구석의 긴장감은 침착한 행동을 지시했다.
인사과 박선생을 찾으라는대로 난 조심스레 그 과의 문을 두드렸다. 현관에서부터 실내는 몹시 조용했고 깨끗했다. 예상대로 간단한 면접과 상식적인 테스트를 했다.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취직의 경쟁심같은 조바심은 없고 그냥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었다. 시설 하나 하나와 실내에 풍기는 분위기는 지극히 아카데믹한 느낌이었다. 사회의 한사람으로 등록되어 일하기 시작한지 한 달 후, 역사깊은(적어도 내 기분엔 그랬다) 첫 월급이란 것을 나도 타게 되었을때 오직 마음은 설레었다.
누가 날 돈을 줄까 하는 의심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때 선배나 선생님을 통해 들은「사회는 무섭다」란 예비지식이 들어맞지 않았다. 외국인 성직자(聖職者)들이 경영하는 가톨릭 신자로만 구성된 작은 회사였고 회사라기보단 한가족 같았고 주위 모든 분들의 이해는 퍽 넓었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일이 제대로 틀이 잡히지 않아 뭐가 뭔지도 모르며 피곤한 것을 느낄새도 없이 바삐 한달을 보낸 어느 추운날이었다.
난 우연히 편집부 일을 돕게 됐다.
집 방향이 같아 같이 다니게 되면서 친하게 된 미스리 언니가 그 과에 있었기 때문에 난 급한 일을 하시는 그 언니와 그과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었다.
우린 일이 끝난후 8시쯤 다같이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때 난 내가 이 출판사에 처음 왔을 때 퍽 인상적이었던 그 과의 과장님을 알게되었다. 폭넓고 이해가 많아뵈는 멋장이인 그런분이었다. 외국인이 한국말에 익숙했기 때문에 난 호기심에서 이것 저것을 우리말로 물었다.
『미국에선 어디에 사셨어요?』
『센트루이스 주에 살았습니다.』
비교적 정확한 발음이었다.
『한국에 나오신지는 얼마나 되요?』
『약 8년됩니다. 한국사람 다됐죠』
조금 특수하게 생긴 그분의 얼굴에 미소가 담기니 더욱 개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한국말에 굉장히 익숙하시네요.』
『조금뿐이…』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우리는 처음에 있었던 어색함없이 친숙함을 느꼈다. 즐거운 식사였다.
그날 난 그분이 바래다준 택시의 폭신한 시트위에서 언니와 함께 이야길하며 나중에 그분이 신부님이란걸 알았다.
난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신부님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며 아주 현대적인 감각이 풍부한 중년쯤돼 보이는 신사라고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난 그분과 퍽 친근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신부님이란걸 항상 염두에 두고 조심스레 대했고 바라봤을때 이따금 구레나르 수염이 멋있게 난 너그러운 그분의 표정과 여유가 퍽 인상적이었다.
신부님 역시 날 귀엽게 그리고 관심있게 대해주셨다. 그것은 때때로 오랫동안 잊어버린 아버지의 정을 되살아나게 했다.
8년 전의 아버지, 사과를 사들고 술이 몹시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의 얼굴…그 모습이 내겐 아버지의 기억으로 마지막 모습이었다. 운명의 불길한 예감같은 것이 짓눌르던 그날 저녁 아버진 기어이 고혈압이란 병으로 가시고 말았다. 다시금 기억하고프지 않은 추억들이다.
조금 각도가 다른 위치에서 난 신부님이 별다른 이유없이 좋았다. 신부님을 대할때 거슴프레 난 수염이 어렸을적 아버지 턱수염의 깔깔함을 상기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신부님의 턱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한번 비벼봤으면 하는 충동을 가끔 짙으게 느꼈다.
난 못다한 아버지의 정, 신부님으로서의 어려움, 친구같은 허물없는 소박한 감정 모두를 그분께 날이갈수록 조금씩 깊게 쏟고 있었다.
자연히 그분 일을 더욱 정성스레 해드렸고 또 그분은 늘 따뜻한 마음으로 관심있게 대해주셨고 그러는 사이 난 아무도 모르게 신부님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기시작했다. 아백지에 대한 향수같은걸 가깝게 느낄 수 있어 난 이따금 어릿광대 같은 것을 곧잘 했다. 그럴때마다 커다란 잘못을 해도 너그럽게 감싸줄 수 있는 그분의 포옹력있는 표정이 난 무척좋았고 또 이상스러울만치 깊은 안도감을 느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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