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고요속에 뜰안-풀벌레와 귀뚜라미가 울어대도 열어놓은 창문으로 싸늘한 바람이 스며들어도 나는 가을을 느끼질 못했다.
그만큼 나의 감각이 둔해졌거나 아니면 구질구질한 현실생활속에 얽매어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가을은 나에게 서서히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격으로 가을은 별안간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제치고 밀어닥친 것이다. 어느날 밤이었다.
급한 원고가 있어서 나는 책상에 마주앉아 원고지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씨름을 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실은 한자도 메꾸지 못한채 원고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샘은 메말라 버렸고 영혼의 불빛마저 어두워졌는지 아무것도 통생각해 낼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간힘을 다하여 무엇인가 붙들어 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허공뿐이다. 절망의 심연속에 빠져버린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것은 내가「나」자신과 만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나」를 목마르게 불러봤지만 어데론가 가버린「나」는 나에게로 돌아와주질 않았다.
자정이 넘었다. 열병 화자모양 나는 잔뜩 열에 들떠 있었다. 그 이상 더버티고 앉아 있을 용기를 잃은 나는 자리를 박차고 뜰로 나갔다.
뜰안엔 어느덧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끈질기게 우르렁거리던 거리의 차소리도 뜸해졌고 개짓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을씨년스럽게 울어대던 풀벌레들도 이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소리가 온통 제거된 어둠속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흐뭇한 고독이 출렁대었다.
「가을이로구나!」
피부로써가 아니라 가슴과 영혼으로 느껴지는 가을이었다. 가을은 나로 하여금 여정(旅情)을 불러 일으켰다. 마음이 초조롭다. 어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의 마음은 벌써 저 수많은 별을 향하여 잃어버린「나」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진정 나는「나」아닌 나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온 것일까….
「나」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곳엔 고뇌와 비애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 고뇌와 비애속에만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그것이 괴롭고 역겨워 피해왔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지식이란 것에 비중을 두고 독서에만 몰두해 왔다. 그러나 지식이란 무엇일까? 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해, 현실이 주어진 생존조건에 자신을 보다 적절하게 적응시키는데 필요한 능력을 향상시켜가는 일에 불과하지 않을까? 창조는 결코 지식의 조립이 아니다. 창조사업의 하나인 문학은「나」의 발견이며 표현이다. 또한 문학은 끊임없이 진실을 구하는 탐험행이다. 누구에게서든 사거나 받을 수 없는 진실이며 「나」의 내부에서만 태어나게 할수 있는 진실이다.
순수한「나」, 본연의「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나는 길을 떠나야겠다. 많은 진실이 매장되어 있는「나」를 향하여 찬란한 별을 향하여 걸어가야겠다.
잠들었던 풀벌레가 일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가을이 나에게 다정한 손짓을 하고 별들이 소근거린다. 메말랐던 마음의 샘에서 한줄기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컴컴하던 영혼에 불이 켜졌다.
「나」의 참모습을 되찾고 꺼졌던 진실의 등불이 하나 하나 켜질때 나는 수많은 별을 바라보아도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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