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는 냇물, 이곳에서 어릴때 가제와 송사리를 잡으며 이리저리 뛰놀던 생각을 하며 나는 부지런히 맑은물에 얼굴을 씻었습니다.
산뜻한 물내음과 함께 그리워지는 옛날생각을 애써 지우며 나는 큰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또 뭔가 일거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큰집에서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도무지 나와는 말이 없었습니다.
마음속에선 불쾌감이 피어올랐지만 그저 아무말 없이 생활했습니다. 소마굿간과 돼지마굿간도 쳐내며 부지런히 일하는 가운데 어느듯 내 손은 물집이 생기고 아파왔습니다.
그날밤 큰어머니가 오셨습니다. 무엇인가 경계하는 느낌이 먼저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별로 집안일에 상관안하시고 딴 곳에 가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루 이틀 나는 참을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참고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지게를 져보지 못한 나는 아침이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갑니다. 나뭇짐에는 가시가 많아 내 손은 온통 가시에 찔려서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일을 위해서 하루에 백번씩 참기로 했습니다.
한번 참을 때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두번 참을 때는 동생들을 생각하며 참고 세번째는 나를 지켜보고 있을 주위 사람들 즉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생각해서 참았습니다.
논에 나가 나락을 져서 행길로 나가 뿌려놓고 갑니다. 다 나를 때까지 서투른 나의 지겟질로 논도랑에 몇번씩 넘어져가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큰집에서는 마치 나를 머슴마냥 자꾸 부려먹을려고만 했습니다.
하루 지겟짐 30짐을 지고 집에 오면 그나마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아파 축 늘어진 내게 큰집식구들은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막시켰습니다.
이젠 세수할 시간조차도 없었습니다. 나는 몇번이고 그냥 나가고 싶었지만 아버님을 생각해서 참고 또 비록 어머니는 다른 형제이지만 그동안 나를 위로해주던 순렬이 누나를 보고 참았습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과수원에서 가져온 사과를 내 머리 맡에다 놓고 나가며 항상 나를 감싸주는 누나 정말 곽씨 집안에 이렇게 인정많은 분이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인정할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누나는 항상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욱아 너나 나나 전부 불행을 안고 부모의 따뜻한 情을 못느끼고 살아왔어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희망을 잃지말고 굳세게 살아야돼』
이 말을 나는 누나의 진실속의 말이라 믿고 싶었습니다.
큰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타작을 했습니다. 별로 힘드는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오래 하니까 허리가 아파왔습니다.
저녁 무렵까지 쉬지않고 반을 해치웠습니다. 정말 어찌나 고단한지 나는 세수고 밥이고 뭐고 다집어 던지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잠에서 일어나니 이불은 땀에 젖어 축축했으며 온 몸과 팔다리가 쑤시고 아프며 골이 아파 열이 많이 났습니다. 이대로 하루쯤 푹쉬로 싶은 마음 그러나 이날도 타작을 해야했기에 일어났습니다.
아침밥을 몇 술 뜨고 논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흐릿한게 왠지 비가 내릴것 같았습니다. 오후에 아닌게 아니라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큰어머니는 나만 보면 자꾸 짜증을 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말을 안하지만 간접적으로 어머니와 나를 은근히 욕했습니다. 즉 옛날엔 이마을서도 손꼽는 부자로 40마지기의 농토가 우리집때문에 15마지기밖에 안남아 지금은 입에 풀칠도 근근히 한다는 등 큰어머니의 말속에는 뼈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때마다 치솟아 오르는 나의 분노, 『그래 작은집 자식은 남의 집 식모로 보내고 큰집자식은 전부 고등학교 보내서 시집 장가 보내는 것은 죄가 아니요』하고 되받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때마다 옆에서 열심히 타작기를 밟고 있는 누나를 생각해서 참았습니다.
그날이 지난후 나는 많은 고뇌속에 빠져 지난날보다 더 괴로움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달리 꾸중하고 나무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참을수있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죽어도 못참았습니다. 고향에 온지 20여일. 나는 아버님과 나를 보살펴주던 누님께 한통씩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아무도 몰래 대구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갈곳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날씨가 쌀쌀하게 추워만오고 하복지바지에 잠바차림의 나에게는 하루생활비밖엔 없었습니다. 다시 밀려오는 악몽 그러나 다시 그 짓은 할수 없고 애써 악몽을 지우며 나는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혹시 일자리라도 있을까? 두루 살피며 기웃거리는 내 눈에 일자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푼 안되는 돈 나는 그날 한끼밖에 못먹었습니다. 그나마 추운날씨에 어김없이 찾아온 밤, 발길 닿는데로 정처없이 걸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나도 모르게 옛날 왕초집 앞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벨을 누르니 아주머니가 나왔습니다. 초라한 나를 보는 아주머니의 차가운 눈길과 말없는 그 입을 쳐다보며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참되게 살려고 일자리를 구하다가 못구하고 날이 저물어 갈데가 없으니 오늘 하루밤만 재워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 아주머니의 말, 『우리집은 옛날을 청산한지 오래니 찾아오지 말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분노와 울분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억지로 눌러 참고 말없이 거리로 걸어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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