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히 싫지않은 위치에서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D극장에서 절찬리에 다시 상영되는「닥터 지바고」를 함께 감상했다. 숙녀를 대하는 예의와 매너는 훌륭했고 호감이 갔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신부님을 잊어야 된다는 결심은 하지 못했다.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서도 일단 헤어지고 나면 하나도 머리 속에 기억해 둘만한 아무런 감정을 발견치 못한 것이다. 그리곤 집에와 자리에 누어 신부님만을 생각하고 슬펐던 일 기뻤던 일을 몇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시간가는줄 몰랐고 어느새 잠에 빠져 들었다. 신부님이 안계신 현실은 추웠고 걷는 길마다 모든 건물, 개나리가 활짝핀 산이라도 모두가 허전하고 텅비어있는 것 같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신부님이 가신지 몇달후에 난 예전부터 알고있던 마가렛이란 본명을 가진 수녀님으로 부터 여러가지 충격적인 애기를 들었다. 위에 두 눈썹이 까맣고 눈이 몹시 예쁜 수녀님이었다.
곱게생긴 얼굴관 반대로 성격은 소탈했고 말과 행동도 남자같이 시원시원한 분이었다. 내가 대접한 커피를 드시면서 수도생활에 대한 내 물음에 차근차근히 이야길 들려주었다. 얘기를 열심히 듣던 나느 수녀님의 어떤 얘기에 몹시 놀랐다. 그것은 그 수녀님하고 아주 가깝고 또 가장 존경하던 J란 신부님이 수도회를 나와 어떤 여대생과 결혼하였다는 이야기를 한동안 멍청히 앉아있는 내게 조용한 말씀으로 수녀님은
『신부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죠. 그러나 그들에게는 평인과는 다른 보호하는 사랑이 필요하지 끌어잡아당기는 사랑은 필요치 않은겁니다. 그분은 공든탑이 무너진거나 다름없죠. 그 신부님이 계속 수도생활을 하시면서 많이 남지않은 생을 마치실 수 있도록 여자가 피해줬어야 옮았습니다』
멍청히 창박을 내다보고 있는 긴 시간동안 라이락 향기짙은 봄날의 풍경은 내 시야에 무겁게만 비춰졌다.
눈썹이 까만 수녀님의 그 이야긴 지금까지도 마음 한 구석에서 늘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 역시 참으로 심각한 얘기로 들었고 기분이 이내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 슬픈마음 한 구석을 헤집고 파고드는 또 하나의 새로운 감정이 용솟음치는 것을 난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나와 신부님과의 사이가 아주 허망한 것은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오래 같이있고 싶어하듯이 나와 신부님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각되고 나서였다.
여름이 다 돼서야 신부님은 몇달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셨다.
난 이내 신부님께로 달려갔다. 반가움에 우린 잠시동안 말을 잊고 있었다. 신부님은「빠리」에서 사셨다면서 인사가 오고간 뒤 진주로 된 예쁜팔찌를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정말 울고싶도록 기뻤고 좋았다.
그렇게 기쁜 선물은 처음 받아 보았고 다른사람에게서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아도 그렇게 기쁘지는 않을것 같았다.
그렇게 바쁘셨다는 여행중에서도 날 잊지 않으셨구나 하는 고마움이 더 컸는지 모른다. 초록빛 잔디위에 끌러놓은 하얀 진주알들은 정말 고귀하게 보였고 손에 찼을때 약간 늘어지는 그 진주는 흡사 어느나라 공주의 손에만 차는것 같이 그렇게 귀중스레 느껴졌다.
그렇게 풀렀다 껴봤다 하기를 얼마나 많이 거듭했던가. 그 후로 신부님께 받은 선물은 쑥색 가죽장갑ㆍ세련된 무늬의 실크 마후라였다.
모두가 옷에 꼭 있어야할 필수품같이 잘 어울렸다.
아니 신부님이 그렇게 신경을 써서 사주신거라고 난 생각했다.
좋지 않았어도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고 좋게 생각됐는지 모른다.
난 예쁜 목각인형을 신부님 책상위에 놔드렸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연두빛 바탕위에 빨간 포인세치아 꽃수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방석을 선물했다.
신부님에게 넥타이나 담배파이프 아니면 그분의 필수품을 사드리고 싶었지만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아 아니 그보다 혹 내가 신부님을 좋아한다는 그 감정이 표현화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때문에 그만 두려워졌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쓰시며 사용하시는 물건 전부가 신부님의 개성을 설명해주듯 아주 고급품이었고 사내 전체에서 제일가는 멋장이로 이름났을 정도로 세련된 분이었다. 늘 평인과 같이 사복만 하셨기 때문에 검은 신부복을 입은 다른 신부님들에 대한 딱딱한 감을 느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나로 하여금 신부님께로 거리감없이 친숙해질 수 있도록 만든 원인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해 그러니까 67년 6월 더운 여름날 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성세성사를 받았다. 모든 주위사람들의 즐거운 눈빛과 축하해주시는 말씀에 감정은 무척 벅차있었다. 그런데 난 신부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겉으론 웃고있었지만 속으론 한없이 허탈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실은 그 신부님으로부터 축하한다는 말을 가장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신부님은 나에 대해 관심이 없는게 분명했다.
내가 신부님에 대한 관심이 많으니까 신부님 역시 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이 보였고 생각이 됐던 것이나 아닐까? 그렇게 생각된 그때부터 난 신부님께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일체 신부님 방에 드나들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라도 될수록 삼가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또 한 구석의 묘한 마음으로 얼마안가서 허물어졌다. 신부님이 과연 나를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졌기 때문에 6월이 지난 초가을 9월말에 난 검고 기다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아주 짧은쇼트 헤어스타일로 만들었다. 나를 변화있게 만들고 싶었고 또 신부님의 놀라운 표정을 흠쳐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부님의 나에 대한 관심이 많을수록 크게 놀랄터이니까. 이튿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이었고 더 좋다는 등, 먼저 긴머리가 제일이라는 등 떠들어 댔다. 난 빨리 신부님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 전날 급하지 않은 일이라며 오후에 부탁하신 일을 부리나케 끝마쳐 가지고 3층 복도까지 막 뛰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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