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앞뜰에서 받은 코스모스 씨앗은 빈 유리병 안에서 겨울을 났었다.
씨앗은 눈오는 겨울을 유리병 안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병은 유리창 람마위에 얹혀있었기 때문에 사방을 두루 볼수가 있었던 것이다. 봄이 되어 딸아이가 유리병의 꽃씨를 쏟아 뜰에 뿌렸다. 비가오고 햇볕이 쬐고 하여 코스모스는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쩌다 유리병에서 나오지 못한 씨앗 한개가 빈병 안에 남아있게 되었다. 아무도 남은 씨앗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나 망각(忘却)된 존재, 씨앗은 유리병 밖으로 나날이 자라는 제 형제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여름을 보냈다. 씨앗은 혼자 생각하였다.작년 가을 어머니품에 안겨 자랄적의 즐겁던 일 자랑스럽던 일 희망에 부풀었던 일.
멀리 멕시코의 고향을 떠난지 헤아릴수 없는 긴 세월이 흘렀고 이 지구의 어느곳에서나 한결같은 모습과 빛깔로 꽃 피어온 제 조상의 역사를 생각했다.
유럽 어느 촌락에서나 한국 어느 농가의 울타리에서나 일본 어느 학교 뜰에서나 제모습 그대로 그 환경에 어울려서 정답게 살아온 꽃이었다.
어느 돌자갈밭에서든 어떤 거름기 없는 박토에서든 시들어 죽는일 없이 자라 가을하늘에 맑은 얼굴을 들고 하느작거리는 귀여운 소녀같은 이 꽃은 얼마나 굳세고 얼마나 다정한 꽃인가. 코스모스는 그렇게 살기를 좋아했고 그것이 수만년 수십만년 이어져온 제조상의 생명의 모습이라고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유리병속에 혼자남은 한개의 씨앗은 울고 싶도록 답답했다. 원통하고 슬펐다. 어머니가 저를 낳았듯이 저도 많은 아기를 낳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 수십만년이라도 이어갈 자기가 맡은 생명은 끊어진다고 생각할 때 씨앗은 울어도 시원치 않은것이었다.
가을이 왔다.
씨앗은 유리밖으로 환히 핀 코스모스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기 뜰에 핀 꽃은 자기가 아니라는걸 자각하고 씨앗은 한숨지었다.
딱딱한 씨앗은 작년 가을 그대로의 모습이요 잎도 줄기도 꽃도 아니라는 걸 생각하니 삶에 대한 욕망이 불같이 끓어 오를뿐 그 좋은 가을날도 우울의 날이 되고 말았다.
코스모스의 씨앗은 제가 담겨있는 유리병을 처음엔 화려한 성(城)으로 생각하였다. 유리로 만들어진 성안에 안치된 행복을 누리었었다. 그러나 씨앗들이 다 나가고 혼자 남아있는 몇달동안 그것은 성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망각의 세계에 놓인 씨앗의 운명은 방면될 기한이 없는 죄수와 같았다.
이제 또 쓰린 세월이 흘러가고 나면 씨앗은 그대로 죽을것이다. 그떄 그 병은 그 감옥은 씨앗의 무덤이 될것이다. 망각된 것의 운명이 이렇게도 불행하다면 망각된 자는 자기를 남에게 내보여야한다. 코스모스의 씨앗은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못할뿐 그 무슨 길이라도 있는지는 마땅히 자기를 외쳐 남을 깨닫게해야한다. 이 씨앗보다 유리한 처지에 있는 생물은 소리칠 수 있을 때 함성을 지르고 그것도 안되어 몸에 불을 질러 태우는 극한적인 행동도 한다. 아 가엾은 코스모스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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