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흥분이 채 가시기 전에 실망감이 엄습해오면서 의문이 고개를 든다. 세상의 아름다운 땅과 큰 민족을 마다하시고, 하느님께서는 어찌하여 이 보잘 것 없는 사막과 황무지를, 이 조그만 민족을 선택하셨을까? 왜? 왜?
모든 생명의 출발이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역시 그래서 그렇게 겸손하고 작은 선택을 하신 것일까? 하느님의 겸손 앞에 사람 역시 자유로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팔레스티나는 불타는 사막과 황무지이지만, 녹색과 생명으로 가득 찬 장소가 있다. 북에서 흘러 모여든 강들이 큰 호수를 이루어 팔레스티나 생명의 원천이 된다. 이 호수는 남쪽 요르단 강으로 다시 흘러 사해로 들어간다. 사해는 소금과 죽음의 호수로서, 재미있는 사실은 사해가 더 이상 다른 곳으로 흘러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해는 그 물을 다른 곳에 주지 않는다. 모으기만 할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지형을 통해서 이미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듯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낌없이 주는 것. 자기 것으로 움켜쥐려고 하면 죽는다는 것. 마치 갈릴레아 호수와 사해처럼.
한 사람이 살 줄 안다는 것은 어릴 때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를 벗어나고 남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남에게 자기 것을 줄 줄 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류도 오랜 역사를 살아오면서 산다는 것을 체험으로 배우는 것 같다. 옛날의 노예제도나 폭정은 차츰 사라지면서 국가 사이에, 민족 사이에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려는 노력이 많아지고 있다. 강대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타민족을 깔아 뭉갤려고 할 때 자기국가도 결국 평화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배우고 있다고 할까?
이런 의미에서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IMF 협성은 최소한 싸우지 않고 협력관계만이라도 이루어야 자기 국가가살아 남을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리라. 국제관계에 있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았다고 할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되어있다.『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참으로 산다는 것은 아낌없이 생명까지 준다는 것. 예수님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그 사랑이 죽음에 이를지라도.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사실 많은 경우 종교적이요, 윤리적인 차원에서 알아듣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한 민족이나 인류도 이제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자멸하고 만다는 현실을 체험적으로 깨닫는 것 같다. 지구를 스무 번 이상 콩가루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를 보유한 인류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한 민족의 멸망일 뿐 아니라, 지구자살을 감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듯하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하느님의 벌일 수 있지만,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던 자연스런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느 사회가 산다는 것을 거부하고도 존립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은 온 인류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개인이나 민족, 모든 국가가 지켜야할 세계의 헌법이리라. 또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대자연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사랑임을 보면서 우주의 유일한 법으로 제정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는 요즈음 사랑의 문화에 대해 강조한다. 즉 모든 문명의 밑바탕에 사랑이 깔려있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이요, 우리를 비인간화하여 결국 파멸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최소한 인간존엄성과 사랑위에서 문명을 구축할 때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으며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하느님의 이 법칙에 순응하고 있는가? 일 년 동안 낙태되는 어린 생명이 백만 명에 달한다. 향락산업은 번창일로에 있으며, 지난해 10대 범죄증가율이 70%에 육박했다. 또한 부동산 매매로 인한 이익금이 60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정치범이 5공보다 갑절이 된다. 사치성 수입품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그중 어떤 품목은 몇 십 배로 가격을 올려 판매한다. 한편, 20만원으로 한 가족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도대체 우리는 산다는 것을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삶의 자리에서 세계성체대회를 생각한다. 미사 중 성체거양을 하면서 우주를 들어 올리는 중량과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성체 안에 우주의 전 생명이 들어 있지 않는가! 십자가 사건으로 생명을 바친 그분은 그래서 성체대회를 통해 「나누라」고 말씀하시는가 보다. 이것이 산다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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