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말셀은 아주 어려서(아마 4才경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 어린 말셀은 속으로『이다음에 커서 이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했다는 기록을 그의 작품의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이처럼 일찍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쓰라린 경험은 그의 철학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가브리엘 말셀뿐이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을 생각해 보지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번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두고두고 몇번이고 생각해보았을 것이며 또한 깊이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인간이란「죽음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해도 무방할듯 하다. 그러고보면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죽음을 경험하기 위한 일생인지도 모를일이다. 죽음을 체험하고 죽음을 배우는 일생, 죽음에 대해서 질문하는 제자에게 공자는 아직 삶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거늘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겠느냐는 대답을 했다고 하는데 이 말속에도 죽음은 삶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것 같이 보인다. 죽음은 삶의 구석구석에 섞여있는 것 같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속에서 추구하는 가지가지의 삶의 아름다움과 슬픔과 기쁨은 죽음이라는 바탕이 없이는 창작하지 못한다. 많은 순국선열들의 정신이나 민족문화의 전통 속에 살아있는 죽음의 뜻도 그러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 뿐만아니라 만물속에 섞여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깊이 파악한 것을 아마 헤라클레이토스는「만물은 유전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드물게 보는 천재였으나 항상 우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왕자 싯탈타가 뼈저리게 느낀 무상도 모든 존재속에 섞여있는 죽음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이고 엄숙한 죽음이 있다. 그림자같이 삶의 구석구석에 끼어있는 죽음 말고 삶과는 완전히 단절된 죽음이 있다. 삶과는 전연 이질적인 죽음, 삶을 통해서는 이해되지도 않고 도달할수도 없는 싸늘한 죽음이 있는것이다. 아무리 안타깝고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가혹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 단 한번밖에 없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영원에로 통하는 죽음이 있다. 이 죽음은 인간이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추구해도 끝끝내 다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현대 문명세계는 죽음의 문제를 크게 흔들어 놓은 것 같다. 죽음이 너무도 흔해진 것이다. 다시말해 삶이 너무도 천해진 것이다.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떼죽음이 상식같이 되어버렸다. 사람의 목숨이 하루살이 목숨같이 가볍게 대량학살되고있는 것을 보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게 된것 같다. 생명의 존엄성이라든가 죽음의 절대성을 생각할 여지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까지 생긴다.
몇세기 동안에 희생된 전사자의 수효보다도 훨씬 많은 육해공에서 매일같이 죽어가는 교통사고의 통계, 비아프라와 동파키스탄 동지에서의 수백만의 숫자로 헤아리는 아사자와 전사자의 소식, 이대로가면 원자무기의 위력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게 될 지도 모를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참으로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보다 귀중한 가치를 위해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삶에 대한 권태 또는 절망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풍조가 일반화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죽음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회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 죽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현대세계에 있어서 아무리 대량학살이 빈번하고 뚯없는 죽음을 많이 경험했다 해도 그것은 모두가 타인의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나의 죽음이 아닌 것은 일반적인 죽음이요 추상적인 죽음이다. 일반적인 죽음의 경험은 할수 있어도 나의 죽음은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나의 죽음도 남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을는지 모를 일이지만 다만 한번밖에 없는 죽음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다. 수백만 또는 살아있다고 해서 그것은 내가 죽은 것과 다르고 내가 살아있는 것과도 다르다.
죽음의 존엄성을 회복하는데 현대의 실존철학은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라고 하겠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쓴 키엘 케고을에 의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육체가 부패하는 것처럼 죽을 수는 없는 것이고 다만 영적인 죽음만이 가능한데 그것은 절망이라는 병에 의해서라고 한다. 과연 나는 죽음을 당했을때 절대자 앞에 절망을 할 것인가? 아니다 나는 그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그만큼 약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절망은 없어야 하겠다.
그리고 이 희망은 전우주적 진화의 목표인 생명이 인간화하고 또 다시 초인간적인 생명을 향하여 그궁극적인 완성의 길을 가고 있다는 떼이야르 신부의 비전과도 공동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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