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사람의 모습은 신의 모습대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신은 자기의 모습을 닮은 이 사람을 바라보니 매우 흡족하였다 합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였겠습니까? 생각만해도 과분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와 닮은 신을 생각하고 싫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까닭은 사람의 모든 비밀 때문입니다. 황금도 기타 귀금속물도 아닌 진흙으로 빚은 가장 장난스런 물질로 만들어져 영원히 불완전한 상태로 있는 한 신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숨은 모든 추악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신을 거부하였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신을 갈망하고 신 없이는 살지 못하지만, 슬프게도 저렇듯지 엄하고 거대한 우주의 창조주 신을 가져 본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한 신의 소유를 단념해야만 옳을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비극속의 주인공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슬픈 눈물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 누가 신의 소유를 절규한다면 한갓 환상의 존재가 아니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과거를 통하여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제관이고 예언자적 위치에 올랐습니다. 신은 그 본질로 다만 영원무궁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신은 여기저기서 도깨비처럼 발현합니다. 그런 도깨비는 허수아비지 절대로 신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념과 주의사상에서 그 시대에 알맞는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 내놓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니이체가 말한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가운데 사뭇 신에게 회의를 품었던 사람들이 자주「신의 명제」를 들고 나서서 인간적 심판을 내렸습니다. 신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신을 심판합니다. 근엄하게 인간의 모든 비극적 요소, 크게는 전쟁을 도발하여 역사를 만들고 종교적으로는 섭리를 다스리는 주범자인 신을 심판합니다. 신은 죽은지 오랜데 아직도 처형을 못한듯『신은 죽었는가?』의 저 빌라도 총독식 물음을 던지고「신의 죽음의 신학」이 역설적으로 대두되고 있으니 현대인에게는 어떻게 보면 빈사상태에 있는 신들을 우롱하고 있는듯 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은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것이니 이 영원성을 지닌 신이 방황하는 우리를 시시각각으로 시험합니다. 저 구약시대는 신과 싸운 사나이 야곱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역사속에서 신에게 뿐 아니라 다윗과 꼬리앗의 대결은 되풀이되고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의 원수가 진실로 인간뿐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 세상에서 결코 그 누구도 인간이 인간의 승리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살라고 내던져진 이상에 싫어도 살뿐 어디로 가나 막막한 대해에 표류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신의 깊은잠을 깨울 때까지 난파의 구원을 포기할수는 없습니다. 바알의 신은 깊이 잠들어 깨울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여호와신을 목놓아 불러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보아도 소용없다는 말을 들습니다. 『하느님 맙소서』『하느님도 무심하시지』처절한 비탄속에서 원망을합니다. 믿을 수 있는 신은 우리 인간세계와는 먼거리에 있으며 신들은 각각 나들이 갔습니다.
신은 세상을 사랑하였고 특히 사람들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선만 아니라 어떤 악에 대해서도 자비의 침묵을 하시는듯 죄없는 사람들이 무참하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더욱 알아들을 수 없다 합니다. 누구는 인생을「일회적 초대」라했습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초대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초대는 되었지만 그 초대에 불응하는 자유는 절대로 없고 일반적 초대이면 그것은 고마운 초대는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난 이상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 하나는 위대한 인간의 유산입니다.
저 나찌스시대의 유대인 수용소의 이야기는 너무도 슬픈 인류의 수난이었습니다. 분명히 6백만명의 죽음의 초대이며 죽음의 긴행렬이었습니다.
독일병사가 호령합니다. 무서운 한발짝은 생사의 결단이었습니다.
『숙련공은 한발짝 앞으로! 여기엔 증명서 따위는 필요없어!』한발짝 나선 자는 남아있고 그의 처자는 그보다 한발짝 앞서 가스실로 갔습니다.
『지금부터 얼마나 중노동에 견디나를 시험한다.
우크라이나병들이 몽둥이와 철통으로 너희들을 칠테니 넘어지는 자는 총살이다. 열을 셈하는 동안 자신없는 자는 열 밖으로 나오라!』아무도 그 한발짝을 떼지 않았습니다.
총의 개머리판에 15분후엔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자를 다시 총살할 필요없이 모두 죽어나갔습니다. 이 무서운 한발짝은 초대에서 죽음에로의 결단이었습니다.
이 한발짝은 신 앞에 나아가는 심판과도 같았습니다.
동료중 한사람이 낮에 죽은 그 어떤 혈육을 위해 바라크속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옆에서 한 사나이가 소리쳤습니다.
『닥쳐! 신을 찬송해서 무얼하나!』
『신이 무엇이냐 자비가 무엇이냐!』
『쓸데없는 기도는 집어치워!』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한 말로 들립니다. 그때 한 노인이 외치는 자의 어깨위에 조용히 손을 얹으며 하는 말이『여기는 나락(나落)이야 우리는 신의 구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했습니다.
이 극한의 상황속에서 철저하게 실망한 사나이와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걸고있는 노인의 대조는 각기 다른 감회를 안겨줍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라는 정신병리학적 해설이 있습니다. 사랑함으로해서 산다는 의의를 갖습니다. 사랑은 반사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작은 행복일지라도 연인에게 베푸는 정이 있음으로 해서 크게 행복하려 합니다. 극한지대에서『자기가 사랑하고있는 애인이 다른 어느 바라크속에 있는 것만도 그를 생각하고 혹은 자기가 죽는 것이 어떤 의미로 신을 위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면 적어도 죽기전까지 사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유대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정신과 의사 후랭클은 말했습니다. 구원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길외는 아무도 지지해 주지않습니다. 애정과 신뢰는 인간의 약점이 될수있습니다. 배신과 배반은 그의 소산입니다. 고ㆍ스톱의 고독한 인생항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지키지 못하고 때로는 집단적으로 약탈을 당했습니다. 둘이 나누는 키스는 그 주위에 숨은 자객에게 신호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자는 경험적으로 살고 있지만 자기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습은 신의 모습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칩니다. 신은 자기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했습니다. 배신자에게 사랑을 했다는 과거를 후회하는 인간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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