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천리, 경의선 3등 열차, 차창마다 하얗게 덮힌 성에, 성에 낀 사이로 의사「지바고」처럼 내다보는 먼산, 가까운 들은 눈부신 백설에 묻혀 차라리 한없이 평화스러웠던 내 고향 북녘의 기억, 그것은 까마득한 세월의 밑바닥에 깔려 이따금 가슴에 불을 켜듯 되살아나는 은밀한 회상의 한 토막이다.
산골 간이역 같은 촌역두에 내리면 사나운 북풍은 온몸을 삼킬듯이 후려갈긴다. 털목도리에 깊이 얼굴을 파묻으며 얼어붙는 털신을 탈탈거리며 그 낡고 조그마한 목조집 역사 안으로 달려 들어가면 낯익은 쇠난로 하나 겨울이면 어제나 그 자리에 그 모양으로 앉아 빨갛게 불을 태우고 있는것이다. 별로 불을 때주는 사람도 없었다.
난로가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허줄한 차림의 시골사람들이 말도 없이 들러서 덜컹거리는 창너머 먼 철로를 바라보거나 간혹 투박한 사투리의 가라앉은 인사말이 몇마디 오갈뿐 적막하기 그지없는 역사 안에서 낡은 쇠난로는 저혼자 마냥 신나게 타는 것이다. 기차가 들어오고 떠나는 시간에만 타는 그 고향의 역사의 둥근 쇠난로 앞에서 나는 번번이 떠날 줄을 몰랐다.
15리나 넘는 집까지의 먼 고개길이 너무도 아득해서….
난로의 모양은 아무래도 좋았다.「베치카」「화이어플레이스」그런 멋쟁이 서구식 벽난로에서부터 시골 본당에 진흙으로 쌓올린 화덕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서 타는 것은 오직 다름없는 불인 것이다 그 새빨간 봄꽃, 이글이글 타오로는 불꽃이야말로 인간생활에 따뜻한 안식과 너그러운 인정을 풀어 놓게하는 마술사임에야….
내 가난한 추억속에도 소학교 교실에서 피식거리며 타던 쇠난로가 있다. 점심때면 젊은 담임여선생님이 하나하나 도시락을 난로에 얹어 데워주시던 따뜻한 사랑의 기억, 사무실 한옆에서 사위어가는 난로를 둘러싸고 오징어다리나 고구마를 구우며 퇴근시간의 한때를 동료들과 지껄이던 젊은날의 기억, 보다 더 까마득히 올라가 할머니 무릎앞에 앉아 질화로에 묻어둔 밤알을 잦으며 옛이야기를 조르던 유년의 기억, 그것들은 지금도 내피 속에 지울수없는 한 색소를 따로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진실로 백설에 덮힌 깊은 산가 아니면 어느 외딴 촌가의 끄슬린 화덕앞에서 통나무 장작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여숙의 애틋한 정을 한잔 포도주에 풀며 영원을 다짐한 사랑의 기억을 가졌다면 인생을 술회하는 정일한 로년의 한때를 가졌다면 그들은 생의 극치를 누린 정복자들임에 틀림없다.
불은 장작불일수록 좋다. 솔가비나 삭정이라면 더욱 멋이 있어 좋다. 한개피를 집어넣을 때마다 바지직 바지직 나무껍질튀기는 소리가 감미롭게 가슴을 조인다. 장작불은 맑고 향그럽고 빛은 더욱 선연하다. 창밖에 함박눈이 내리면 풍취는 더더욱 한폭의 그림이다. 친구가 있으면 다정해 좋고 없으면 그런대로 호젓해좋다.
낡은 시고나 묵은 편지들 아니면 옛 화첩들을 뒤적이면서 골돌히 그 한사람을 생각해보고 그러나 창가에 기대어 잠시잠이 들어도 무방하다. 험상궂은 겨울바람도 이불붙는 난로까지는 얼씬하지못할것이니 마냥 窓이나흔들다가게하면된다.
그아득한 태고인류의 은인 프로메태우스가 천상에 올라가 제우스 왕궁의 부엌에서 회향나무가지에 불을 붙여 훔쳐다가 인간에게 준 이후, 인간은 불을 얻어 갖가지 불쓰는 법을 배우고 어두운 밤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건만 지금 인간은 그 불 때문에 또한 골치를 앓고 있기도 한 것이다.
장작불의 시대는 무연탄의 시대로 바뀌고 이제 그것마저 심한 공급난에 빠져 석유와 경유 방카c유 같은 오일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들 마음을 그처럼 도연하고 나긋하게 풀어놓던 장작불 대신에 지금 우리는 기름냄새, 가스냄새에 골을 짚으면서 그래도 불이 아쉬워,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쉬워 오일스토부 앞으로 한걸음씩 모여앉는 것이다.
따뜻한 인정과 대화의 오솔길을 찾아, 은밀하던 유년의 가버린 날들을 찾아 겨울 불이 주는 호사스런 마력에 탐익해보는 것이다. 얼어붙은 눈속에서도 불이있어 인간의 생활은 마냥 풍요로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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