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신을 볼 때까지」문동이 시인 Y씨의 편지 속에서 얻은 금언을 나는 노래처럼 외우고 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다행하다. 하지만 때로는 인간이기에 너무도 불행할 때가 많다. 그 누구의 탓이 아니라 스스로 그 밝았던 눈을 찔러 실명해버린 그 비참 몸부림치는 것은 단한번만이라도 하느님의 얼굴을 보지못한 방황이다. 설혹 보았다면 그것은 망령이요 설혹 보았다면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았다는데 그것들은 어처구니 없는 환상이었다. 인류는 건망증에 굳어버려 불행하였다. 자꾸만 눈을 부비면서 무엇인가를 찾고있다. 고흐라는 화가가 있었다. 한때 그는 예수의 얼굴 그리기를 단념하고 말았다. 다른 화가들은 서슴없이 잘도 예수의 얼굴을 그리는데 탄복할 뿐이었다.
음악을 포기한 포오레는 베르디의「레뀌엠」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마침내 하나의 훌륭한 진혼곡을 작곡하였음과 같이 고흐는 혼연히 붓을 잡았다. 그것은 나자로가 부활하는 장면이었다. 습기와 이끼에 젖은 바위며 염포가 벗기운 부활한 나자로 마리아와 말따의 표정 그 다음 차례는 예수를 그릴 차례에 그만 손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은 하느님의 모습이라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본시 모습을 갖춘 분이 아니시기에 그의 아들 예수 또한 무슨 모양으로 계신 분이 아니었다. 고민끝에 드디어 그렸다. 그는 무덤밖 하늘가에 둥근해 하나를 그려 그 찬란한 광채를 어두운 무덤속으로 던졌다.
차라리 못생긴 온갖 가면을 벗긴 영의 세계에서 절망 가득한 이세상의 암흑과 직면하는 그 빛의 조화를 우리가 볼 뿐이다.
이와반대로 루오는 대담하게 한폭의 화면에 굵다란 원시적 필적으로 눈동자가 매우 큰 예수의 얼굴을 많이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이 경멸하는 흑색을 사용했다. 이 세상의 지배자는 암흑이다. 루오는 비극의 시인이었다. 자기 마음의 영상을 주저없이 그대로, 화면 가득한 예수의 정면 얼굴을 확대시켜 놓는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투시하는 그 눈은 속죄자로서의 그리스도, 고뇌에 물결치는 그리스도, 버림 받은자, 고독한 인간,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자비의 그리스도다.
루오의 그림은 기도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위대한 고백의 예술이다. 깊은신앙의 내면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먼저 하느님께 경건한 기도를 바친다. 『하나의 영원은 사람들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부지중 신앙의길로 들어 오도록 감정적인 그리스도를 그리는 것이다』우리를 잘 대변하는「미쎄레레」의 총결산은『저 사탄의 말을 들으라! 예수를 시험할 작정으로 이 비참한 대지를 예수께 제공한 사탄은 얼마니 어리석은가? 예수의 힘! 그것은 그의 가난함에 있다』고.
예술은 기도하는 마음이라야한다. 나는 마음이 냉담할 때 루오의 그림을 본다. 예수를 그린 루오는 예수를 본 적이 없어도 그는 기도의 세계서 만나지 않았는가? 현대인은 대중속에 고독을 마시고 산다. 이태리 조각가 지아코는 인간내부의 가난한 구조를 갈대와 같은 길다란 막대기 모양으로 그렸다. 그것은 평면상의 사람이 아니라 서있는 고독의 직립이다. 고독한 군상(群像), 아무데서나 만나지는 인간의 모습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