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가 막을 내렸다. 「가톨릭신문」의 각종 기사를 읽으면서, 지난성체 대회 기간을 돌아보고 우리가 기억해야할 부분들이 제대로 조명되고 있는가, 아닌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국내의 교회 안팎에서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 원인의 하나였지만 모든 준비과정이 우왕좌왕한 점은 없었나 하는 후회가 많이 든다. 준비는 치밀하게 했으나 과연 유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모든 예상되는 상황에 잘 대처했는가 생각해봐야 하겠다.
예를 들면 행사 기간을 한국사정에 따르다보니 가장 관광절정기에 대회가 치루어지게 되어 재정적 형편으로 꼭 세계성체대회를 함께하고 싶었던 가난한 세계의 형제들이 참여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또 세계의 젊은이가 많이 공부해야 할 시기였기에 그들이 자신의 학업으로 시간을 내기 어렵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앙에서도 제3세계인 제43차 나이로비 세계 성체대회보다도 오히려 적은 외국인 참여의 결과로 나타난 듯 하고 오히려 가난한 형제들도 쉽게 올수 있고 젊은이의 여행 편의기간에 맞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모든 행사들이 겉으론 드러나는 일, 즉 세계적인 유명인물들이 얼마나 참석하였고, 특히 교황님이 함께 하시느냐하는 뉴스를 중심으로 치루어짐으로 인하여, 예컨대 내가 봉사했던 금요일 행사「이웃과의 만남과 나눔」같은 심포지엄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민족, 이 국가에서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난한 민중들을 위한 교회의 의미가 도외시 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을 위한 행사가 유명인들의 수를 세는 것보다는 앞서야 했고, 그들의 아픔에 교회는 먼저 앞장서야했다.
또 행사 전체 기간을 통하여, 아무리 보안적인 확인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모든 행사에서 비표가 앞서야하고 짐 수색을 하여야하고 점심을 굶어야하고 물까지 편하게 마시기 어려운 방법 밖에는 없었는가. 오히려 행사 전일에 먹고 마실 것들이 현장에 먼저 반입되어서 장엄미사 등의 행사를 마치고 나서 전세계의 형제, 자매가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오늘의 큰 기쁨을 함께하는 방법은 없었는가하는 아쉬움도 크다.
평화의 날 행사에서 마이크 준비의 미진함으로 무슨 말씀인지 잘 들을 수 없었던 점, 개막 미사에서 세계 교회의 손님들을 한국어와 외국어로 두 번 소개하는 바람에 성체 봉송 시간이 늦어지게 되었다.
금요일 심포지엄 등에서 통역준비 미진으로 외국 신자들을 돌려보내야 했던 점, 토요일 교황성하 도로 영접에 신자를 동원하면서 너무 일찍 신자들을 동원하여 싸늘한 날씨에 두 시간여를 떨고 기다리게 했다.
성체 분배권자나 안내자는 새벽4시, 신자는 오전7시 이전에 모이게 한 여의도 장엄미사에서는 미사전의 프로그램이 전혀 성스럽고 또 우리 신자들을 성체신심으로 뜨겁게 하지 못했다. 2시간여를 기다려야 용무를 마칠 수 있는 전혀 현실을 예측하지 못한 화장실 준비와 시야를 가리면서 작동도 되지 않았던 대형 화면은 불필요했다. 준비의 부족으로 충분히 편히 앉아서도 경청할 수 있는 교황님 말씀의 많은 부분을 서서있게 함으로써 오히려 지루한 느낌만 주었다.
장엄 미사 중에 왔다, 갔다하는 신자나 음식을 먹고 있는 신자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전 또는 행사 중의 통제가 없어서 아쉬웠고 일어나서 쓰레기를 모으라고 세워 둠으로써 장시간의 피곤으로 행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무질서하게 행사장을 서둘러 나갔다. 그런 통제가 어려운 상태에서 사회자는「질서를 지키세요」하고 고압적으로 소리를 지름으로써 무질서한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 그때보두 앉혀 놓고 함께 성가를 찬송하거나 기도를 바치면서 교황님 주교님, 신부님, 외국손님 순으로 차례차례 떠나보내며 그들을 위한 환희의 연호라도 했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이런 모든 상황들이 왠지 미덥지 못하고 후련하지 못한 앙금으로 남았다.
물론 1백50주년, 2백주년 행사의 벅찬 기억으로 가득한 우리 신자들에게 이런 모든 분심이 그때와의 비교로 인하여 더해졌다.
또 민주화라는 추세의 여파였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이런 큰 행사는 없겠기에 기록해 두어야할 일들은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제대로 보고 넘어가야 한다.
하여튼 앞으로의 우리의 교회는 이런 형태의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에 치중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한마음 한몸 운동」의 뿌리내림도 몇 사람이 헌혈을 하고 입양을 하였느냐는 숫자의 나열에서 벗어나 그 모든 일들이 우리 사회와 또 우리 신앙에 어떻게 생활로써 뿌리박혀 가는가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교 제3세기를 맞으면서 더욱 충만하고 성숙된 낮은 목소리로, 믿음을 탕으로 우리 교회는 이 민족의 모든 몸짓과 함께하는 의젓한 자세로 다시 서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