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세계가 생명경시풍조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지금, 인간의 삶이나 그 삶 깊숙히 뿌리박고 있는 희망에 관해 언급한다는 것은 혹시나 뜬 구름잡는 이야기나 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사실 갖가지 재앙과 시련 그리고 압박으로 고통 받고 있는 현대인은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고, 삶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죽음만이 사건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내」가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는 이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과연 있을까!
그런데 삶 자체는 희망과 관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희망이 없는 삶은 살아도 죽은 거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 현대인의 희망 -즉각적이며 제 이차적인 희망 그리고 실망과 기만을 안겨다 주는 희망- 이 아닌 절대 미래의 희망과 관련 된다면, 이보다 더 나은 사건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절망의 동기나 확신은 다를지라도, 절망상태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병자성사를 준 환자의 가정에서 나는 인간의 처절한 절망상태와 진정한 희망의 양극성을 엿볼 수 있었다. 집안의 기둥이 생사를 달리했을 때, 식구들의 곡소리는 대단했다. 세월이 가고 눈물의 샘이 마르면서 그 집안에는 실망의 기운 만이 감돌았다. 더구나 가세가 기울면서 그들의 실망은 하느님에 대한 저주와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일 년 쯤 지났을 때 그 집의 아들 하나가 자살해 버렸다.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 집을 「절망의 집」이라 불렀다. 그 후「절망의 집」사건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묻혀 졌다.
지금부터 4년 전, 그 집 가족 한분이 나에게 성탄카드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는 흩어졌던 퇴색한 제 영혼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식구들의 영혼도 묶어주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살 것 같습니다』알고 보니 그 집은 해외에서 「기쁨의 빌딩」을 지어 살고 있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희망이란 영혼을 깁는 실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조각난 빛바랜 영혼을 모아 꿰매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희망은 인간존재를 보다 심오하게 구성해주는 성격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절망의 집」 이 「기쁨의 빌딩」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남아있는 가족들이 진실로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실망한 자들이 갖는 확신을 버리고 실재를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과 같은 정신적ㆍ물질적으로 중요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이 시대는 실망과 불신으로 팽배되어있는 묘한 실재로서 정의되기도 한다. 많은 이가 체념해 버린지 오래이고 스토아적 냉담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삶은 선물 혹은 선사된 은총이라기보다는 괴로움이며 마지못해 수용해야 하는 희미한 현실이다.
사실 오늘의 세계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올바른 것을 바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세계 안에는 수많은 사회적ㆍ인간적 재앙들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희망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나」 는 희망하는 본체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절망이나 체념상태에서 살아간다면, 그는 자기실현과는 무관한 삶을 계속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향하고 희망하는 바와 관련하여 실현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치유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는 세계 앞에서 인간은 마땅히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반복적으로 정신 안에 누적될 때, 그는 빗장을 세계 앞에 가로지르며 자물쇠로 그것을 잠가 버린다.
대개 이러한 경향은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동기들을 과장하거나, 삶 안에서 발견되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인간이 처한 절망상태나 불행의식은 근거 있는 이유들 위에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희망의 원리는 가능성, 잠재력 그리고 힘으로서 인간존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은 아직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창조세계를 완성될 구원의 세계로 모으는 힘이다.
올바른 것을 희망하는 사람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감추어져 있는 희망의 원리들을 믿고 바라면서 확실한 방식과 근거 있는 이유들에 결합시키는 자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야말로 영혼을 모아 깁는 희망의 작업에 충실한 자이며 삶에 충실한 자이다.
이제 대림절이 시작 되었다.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희망중의 희망인 종말론적 희망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때이다. 현대인들이 그들의 영혼을 과학세계와 물질세계에 저당 잡힌 다음, 진정한 희망을 포기하고 신학적 희망을 세속화하였다면, 그리스도인은 전통적으로 그랬듯이, 종말론적 희망을 존재론적이며 인간적 태도로 해석하고 살아야 할 때이다.
이 세계는 결코「절망의 집」도 아니며 카푸카의 세계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은 극단적으로 절망 하지도, 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대림절은 인간이 희망하는 존재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일깨워주는 시기이며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반성케 하여 이를 삶 안에서 실현케 하는 은혜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 인간역사는 다시 한 번 인간의 거룩한 삶으로 꿰매여져서 절대 미래로 향하게 될 것이다.
『주여,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시나이다』
지금까지 집필해 주신 권지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김현태 신부 (프란치스꼬회) 양상렬씨(변호사) 박영씨(대한적십자사 혈액제재연구소장)께서 수고하시겠습니다.
김현태 신부 <프란치스꼬회>
◇52년 8월 출생
◇81년 가톨릭대 졸업·사제서품
◇88년 로마 안토니대학 철학박사 학위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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